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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10. 2022

입체주의의 출발과 거트루드 스타인

입체파는 야수파와 대치하지 않았다. 1세대 입체파 브라크가 야수파로 출발했다는 사실 하나로 이를 납득할 수 있다. 특히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마티스는 서로 자극이 되었던 관계다. 과학자로 치면,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처럼 경쟁과 존경이 교차했다. 피카소는 여러 양식을 섭렵하며 80년간 1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그 이야기를 하려면, 지면이 절대 부족하다. 다만 그의 입체주의는 사물을 바라보는 인간의 기존 관습에 혁명적으로 맞섰다고 정리할 수 있다. 당시 시공간의 절대성을 무너뜨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상통한다. 피카소는 마티스의 집에서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1899)>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세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다(多)시선과 사물의 본질 문제를 독창성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이 볼 수 없는 방향까지 포함한 입체적 사물을 캔버스 평면에 펼쳐 놓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입방체를 부득이 해체해야만 했다. 이런 면에서 큐비즘(cubism), 즉 입체주의란 역설적 표현이다.


<아비뇽의 여인들(1907)>

243.9x233.7cm의 대형 작품 <아비뇽의 여인들>이 그 출발점이다. 20세기 통틀어, 가장 큰 찬사와 악평을 받은 작품이다. 여하튼 500여 년을 내려오던 르네상스적 전통, 즉 원근법과 해부학을 마감한 문제작이다. 제목 그대로 아비뇽 ‘거리의 여인’들을 그렸다. 작품이 완성된 이후 친구이자 예술비평가인 앙드레 살몽이 농담처럼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비뇽은 프랑스가 아니라 피카소가 어린 시절을 보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번화가 이름이다. 선원을 상대하는 밤의 여인이 즐비한 거리다. 

붉고 파란 커튼을 배경으로 발가벗은 여인들이 도발적인 자세를 취했다. 팔꿈치를 위로 올리고 젖가슴을 내보이며 손님을 유혹하거나, 앉아서 다리를 벌리고 있다. 노골적이다. 고대 이베리아 조각상에서 영향을 받은 왼편 세 여인의 누드에서는 세잔의 <대수욕도> 경향이 비친다. 오른편 두 여인의 모습이 바로 입체주의의 전형이다. 아프리카 가면에서 모티브를 얻어 원시를 상징하는 여인들을 들쭉날쭉 평면으로 분할했다. 여인들은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정면으로 관객의 눈을 마주 대한다. 불편하다. 25세의 피카소는 기존 예술의 권위와 가치에 이렇게 정면 도발을 감행했다. 그러나 당시에 피카소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1916년까지 작업실 한구석에 있다 개인 수집가 손에 넘어갔으며, <초현실주의 혁명(1925)> 도판에 실렸다. 

이후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미술은 초현실주의 내부에서 서구 합리주의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천으로 대접받았다.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품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겨우 그 모습을 제대로 드러냈다. 당시로선 과격한 혁명이었다. 그의 친구 중 누구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1세대 입체파 브라크조차 "마치 누군가 불을 토해내기 위해 석유를 마신 것 같다"고 했고, 드랭은 "피카소가 어느 날 너무 '절망적인' 자기의 그 큰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피카소 입장에서 보면, 차마 대상의 형태를 완전히 없애지 못한 작품이었다.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는 반(半)추상 작품이다. 

<언덕 위의 집 에브로의 오르타(1909)>

오늘날 ‘입체주의’의 연원 가지고 논란이 많다. 피카소의 친구인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마티스의 조롱 섞인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대상은 브라크의 그림이라고 했다. 하지만 피카소와 브라크 모두를 후원했던 화상 칸바일러는 조금 다르게 증언했다. <질브라스>지의 예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1908년 11월 브라크의 <에스타크> 연작 회화를 “형태를 경멸하고, 모든 것을··· 기하학적인 문양과 작은 입방체로 축소한다”고 혹평하면서 등장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마티스의 말을 참고로 했다고 하니 더 이상의 논쟁이 무의미하다. 

반면 “입체주의에 관한 영감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는 문제는 중요하다. 브라크에게서 탄생했다는 주장(<네이버>)”이 있으나 칸바일러와 거트루드 스타인 모두 이에 정색한다. 양식으로서 입체주의의 출발은 피카소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못 박는다. 특히 스타인은 입체주의가 ‘순전히 스페인적인 개념’으로, 그곳 화가들만이 유일하게 입체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피카소가 1909년 6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카탈루냐 마을에 머물면서 자신에게 보낸 오르타 데 에브로의 사진과 풍경화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진정한 입체주의자는 피카소와 후안 그리스 뿐이며, 브라크는 피카소의 영감을 빌린 제자 격이라는 입장이다. 그해 10월 그녀는 파리 플뢰뤼스 가에서 열린 전시회에 피카소의 작품 27점을 걸어놓았다. 이때 입체주의 초기 징후를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 있었는데, 바로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거트루드 스타인(1906)>

대작 <아비뇽의 여인들>을 막 그리기 시작할 때 완성했다. 그러나 당시 화가와 모델을 제외하고는 이 초상화를 맘에 들어하는 이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두 오빠와 올케, 그리고 앤드루 그린은 먼젓번 초벌 그림을 보고 몹시 만족하여 “제발 그 상태로 둘 것”을 조르고 또 조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아무리 보아도 당신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며 붓을 놓고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후에야 단숨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본 이베리아 조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보니 거트루드의 단순하고 육중한 얼굴과 두꺼운 눈썹과 뚜렷한 눈꺼풀이 고대 이베리아 조각상을 닮았다. 피카소는 말했다. 


“사람들은 그림이 모델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결국에는 그녀가 그림을 닮을 테니까요.”


이 말은 훗날 사실로 확인된다. 피카소는 그녀의 내면을 읽고 미래의 모습을 발견했던 거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 ‘벨 에포크’ 시대의 여걸이었다. 당시 화가나 작가가 그녀의 집 ‘플뢰뤼스 27번지’를 출입한다는 것은 출세를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재정 지원 능력도 물론이지만, 놀라운 식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명의 피카소의 작품 <꽃바구니를 든 소녀(1905)>를 세잔의 것과 비슷한 가격, 150프랑을 주고 샀다. 그리고 얼마 후 라비냥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바토 라부아(세탁선, 센강에 세탁하러 오던 배와 흡사하게 나무와 유리로 지어졌다)'라 불리는 피카소의 작업실에 비비고 앉아 80~90회 정도 모델 노릇을 했다. (다니엘 칸바일러, <나의 화랑, 나의 화가들>) 


수탉(1938)>과 삽화 <암탉과 병아리들(1941)>

혹여 피카소가 사실적으로 재현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의심이 든다면, <수탉>과 삽화 <암탉과 병아리들>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수탉>은 피카소가 단순한 재현, 즉 형식적 사실성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탉은 ‘꼬끼오’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지만, 어딘지 엉성하다. 위로 올라간 눈동자는 물론, 벼슬, 날개, 꽁지에서 실물과 차이를 보인다.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곰브리치는 화가의 그림에서 정확성을 갖고 흠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먼저 자문해보라고 권했다. “미술가가 사물의 외형을 바꿀 이유가 있었느냐?”, 혹은 “화가가 그르다는 판단에 확신이 섰느냐?” 잘 모르겠다면, 비판이 성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익숙해진 관념을 벗어던질 때, 비로소 화가의 메시지가 제대로 다가온다. 어린이에 비유한 피카소의 상징적인 말이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나는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어린아이처럼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 (서민아, <빛이 매혹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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