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게르니카>의 시대 배경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했다. 1919년 초청받지 못한 소비에트를 제외한 전승국 27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독일의 새로운 정권이 베르사유 조약을 수락했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패전국 독일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자존심과 함께 보불 전쟁 이전의 국경을 회복했다. 그리고 조약을 통해 이익을 취한 국가들과 블록을 형성했다. 500년 역사를 자랑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쪼개졌는데, 새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왕국의 동부 지역을 차지한 루마니아가 이에 포함된다.
독일 군대는 육군 병력이 10만 명 이내, 군함은 10만t 이내로 제한되었다. 나머지 함대는 연합국에 넘기는 대신 스스로 침몰하는 편을 택했다. 참모본부와 의무병역제도가 폐지되었고, 공군과 잠수함의 보유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영토와 인구가 10% 내외에서 축소된 채 비교적 온전히 보존되었다. 따라서 완충지대를 형성한 다른 강대국과는 달리 국경을 직접 마주한 프랑스는 안전을 충분히 담보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윌슨은 프랑스가 과민하다고 여겼다. 바다가 해자(垓子)인 영국은 오히려 볼셰비키 혁명을 수출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장치로 독일을 인식했다. 어쨌든 독일에 대한 보복과 소련에 대한 적대에 근거한 유럽의 새 질서, 베르사유 체제(1919~1939)가 이렇게 출범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상원에 의해 베르사유 조약이 거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들러리 역할을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고립주의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1921년 태평양 질서의 재편과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목적이 작동하여 해군 건함을 제한하는 군비 축소 회의가 열렸다. 국제적 고립을 피하려는 일본은 미국과의 협조 체제에 동의했다. 영일동맹이 폐기되고,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조약’으로 대체하는 워싱턴 체제가 출범했다. 1922년에는 주력함 보유 비율이 미·영이 5, 일본이 3, 프랑스·이탈리아가 1.67의 비율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문호 개방을 위한 9개국 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과 일본이 주도했던 태평양 시대가 저물고 미국에 의한 새로운 국제 질서가 형성되었다.
한편 독일의 전쟁 배상금은 금으로 환산, 총액 1,320억 마르크(66억 파운드)가 책정되었다. 당시 독일 예산의 100년분 이상이라고 알려졌는데, 매년 20억 마르크씩 분할 지불해야 했다. 세계 어느 나라도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금액이었다. 1921년 첫 지급액 10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12월에 곧바로 지급 유예가 허용되었다.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에, <유럽 외교사/하>)
그러나 승전국이라 하여 형편이 크게 나을 게 없었다. 배상금만으로는 전후 복구를 위한 재정을 충당할 수 없었다. 승전국 배당금의 52%를 받기로 한 프랑스조차 그간의 출혈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1923년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었다. 그러자 프랑스가 벨기에와 연합하여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했다. 이른바 담보 압류로, 독일은 모멸감을 느꼈다. 모멸감은 죽음 다음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독일은 프랑스의 행위를 전쟁으로 받아들였다. 독일 국내에 극우화와 초인플레이션이 심화하였다. 광산주나 기업가에게 보상금을 풀어 조업 중단을 유발했다. 결국, 양측이 타협을 이루어 1925년 프랑스-벨기에가 철수했다.
차제 독일 정부가 머리를 굴렸다. 화폐를 마구 찍어내 그 가치를 폭락시켜 국내 채무(內國債)를 먼저 청산했다. 환율이 급상승했다. 1914년 4.22마르크였던 1달러가 1923년 말 4조 2,000억 마르크가 되었다. 1920년 1마르크였던 감자 한 포대가 1천억 마르크, 달걀 1개는 3,200마르크라는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렀다. 마시고 버린 술병보다도 돈이 가치가 없었다. (이원복, <새 먼 나라 이웃 나라/도이칠란트>) 그해 취임한 슈트레제만이 ‘독일의 토지부동산’으로 보증하는 새로운 지폐 렌텐마르크를 발행함으로써 인플레를 수습했다. 이때 몰락한 중산층이 불만을 품은 채 각 정당의 사병 조직에 흡수되었다.
1924년 이후 미국 찰스 도즈 대통령이 독일에 대규모의 달러 자본을 투입했다. 독일은 이 현금 차관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그런데 이 돈의 순환과정이 묘했다. 승전국은 독일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미국 전시차관을 상환해야 했다. 한 마디로 경제 복구에 무익한 장부상의 거래였을 뿐이다. 오히려 독일이 차관 일부를 활용하여 도시 복구와 군수공장을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산업가와 대지주는 마르크화가 안정을 찾아가자 쌓아 놓은 돈을 은행에서 불렸고, 은행은 자본을 미국의 금융 블록에 투입했다. 금융 중심도시 런던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은 전전 30억 달러에 이르는 채무국에서 1926년 총액 25억 달러의 대(大) 채권국으로 신분 상승했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3>)
그해 12월, 영국이 미국 정부에 전쟁 채무 지급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배상금과 성격을 달리한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1929년 미국 경제는 갑자기 대공항에 휩쓸렸다. 과잉 생산으로 경제의 건전성을 상실한 가운데 유가 증권과 주식 투기가 원인이었다. 다우 평균지수가 약 90%까지 떨어졌고, 실업률은 25%에 달했다. 미정부는 대외 금융 차관을 중지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그러자 독일 은행이 파산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채무불이행 상태가 되면서 폭동이 빈발했다. 남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는 채무 이행을 거부했다. 미국과 독일에서 50%의 산업 생산 감소를 가져왔다. 위기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미국 후버 대통령은 1931년 7월 1년간 채무 지불 유예를 선언하였으나 세계의 모든 국가가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배상금에 의존하던 연합국 측은 경기 침체가 깊어졌다. 1932년, 독일이 더 이상 배상금 지급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연합국 상호 간의 복잡한 채무 관계가 문제였다. 1932년 12월, 영국이 다시 한번 미국에 전쟁 채무 지부를 면제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3년 미국의 무역액은 1/3로 쪼그라들었고 3,0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 계획경제를 추진한 소비에트 연방만 불황을 모면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자본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정치가 경제에 개입했다. 신속하게 돈을 풀면서 과감한 공공정책을 추진했다. 국민의 구매력을 증진하는 데 힘을 쏟은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이다. 그해 6월, 영국의 전쟁 채무와 관련 형식적인 금액만 받고 대부분을 뒷날로 미루어 줄 수 있었다.
국가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군수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이 무렵 전승국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파시즘이 환영받았다. 1928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은 일당 독재체제를 굳혔다. 철학적 기반도 없이 정권을 잡는 데에만 야만성을 드러내는 것이 파시즘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 특히 몰락한 중산층은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미래를 발견했다. 그는 ‘제3 제국’을 건설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항하는 유럽의 전사를 자처했다. 영국을 의식한 우호적인 제스처였다. 이어 연합국 측에 독일 수준의 군축을 요구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독일의 군비 확충에 간섭할 명분이 없다고 못 박았다. 1935년에는 징집제의 재도입을 선언했다. 베르사유 조약 규정을 깨는 첫 번째 공식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의미 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당시 연맹은 전쟁을 억지하려는 의지도, 군사력도 갖추지 못했다. 군축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7년을 소모했음에도 1932년 제네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또한 1920년 윌슨의 주창으로 출범한 국제연맹에 정작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과 함께 동승하지 않았다. 윌슨의 독선으로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국제연맹은 중국과 일본 모두 가맹국이었음에도 일본의 1931년 만주 침략과 이듬해 상해 일대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 행위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본과 긴장 관계에 있었던 미국의 강경한 태도와 달리, 친일로 기울어진 영국과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 일본을 지지했다. 1935년 이탈리아가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를 침략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각국이 자신들의 이해에 급급할 때 독일은 로카르노 조약에서 확정한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1936년 3월, 군대를 배치했다. 이로써 베르사유 체제는 완벽하게 붕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