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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31. 2022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

<푸른 누드 혹은 비스크라의 기억(1907)>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푸른 누드 혹은 비스크라의 기억>은 야수파 시절의 유채화다. 작품 속 여성 누드는 유달리 크고 역동적이며 강한 인상을 준다.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을 연상케 하는 작품으로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버린 추한 누드이다. 다시점(多視點)을 적용하여 상체는 앞에서, 하체는 위에서 본 그림이다. 신체의 음영을 파랗게 처리한 것 역시 세잔의 기법이다. 앙데팡당전 전시회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팔렸지만, 그 가치를 단번에 알아본 사람 중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한 명 있었다. 전시회가 폐막하던 날, 건물 수위의 다섯 살 먹은 아들이 자신을 귀여워해 주던 스타인의 팔에 안기면서 "오! 진짜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에요!"라고 외쳤다. 

<푸른 누드 Ⅱ(1952)>

두 번째 <푸른 누드 Ⅱ>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 말년의 작품으로, 스승 모로가 "자네는 회화를 단순화할 거야"라고 한 예언이 적중했다. 화가로서 그의 처음과 끝은 병원과 관련이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할 때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어머니가 무료해하는 마티스를 위해 사다 준 미술 재료가 인연이 되어 그림을 시작했다. 1941년 1월에는 리용에서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았다. 이후 두 차례 폐색전증이 발병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게다가 위하수증(위가 정상 위치보다 처지는 증세)으로 쇠로 된 벨트를 차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절박했다. 이때 앉거나 누워서 그림을 그릴 방법이 떠올랐다. 1930년대부터 이따금 손에 댔던 유명한 ‘종이 오리기’ 기법(cutting outs)이다. (제목 그림; 또 다른 <푸른 누드(1952)> 연작) 낙관적인 성격과 강렬한 욕구가 있어 가능했던 작업이다. 

건강했던 무렵의 마티스로 거슬러 가 보자. <삶의 기쁨>이란 주제를 반복적으로 그리던 그는 폴리네시아로 여행을 떠났다. 폴 고갱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면서 그의 아들 에밀을 만나기도 했다. 고갱이 그린 인물들과 풍경들을 사진 속에 담고 <자연 속의 고갱>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들을 출판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1946년 여름에 사진작가 브라사이는 흰 종이 위에 '오세아니아'의 추억을 담은 형상을 오려 붙이고 있는 마티스를 목격했다. 


“풍경 하나는 종려나무와 새들이 뚜렷이 보이는 수면 위의 풍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핑크빛과 보랏빛을 띤 산호들이 있는 바닷속 풍경이었다.” (퐁피두 국립현대미술관 수석 학예연구원 디디에 오탱제, <화가들의 천국> 중 '시간의 분할선, 아르카디아')


<폴리네시아, 바다(1946)>와 <폴리네시아, 하늘(1946)>

<폴리네시아, 바다>와 <폴리네시아, 하늘>이다. 그런데 같은 푸른 배경 속이지만, 바다에는 새가 날고, 하늘에 불가사리와 해조류가 떠다닌다. 그러나 굳이 모순임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말년의 마티스가 상상한 세계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고 했던가? 형태가 매우 단순한 것이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하늘과 바다가 섞인 평화로운 세상을 그렸다. 그는 1930년 폴리네시아에서 '아르카디아'를 연상한 듯하다. 아르카디아는 중부 그리스에 있는 실존 장소이나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등의 라틴 문학을 통해 이상화한 축복과 풍요의 땅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유토피아다. 

<폴리네시아 바다(1946)>

많은 예술가가 자신만의 아르카디아를 찾았다. 그중 시냐크와 피에르 보나르는 프로방스에서, 마티스는 이곳 폴리네시아에서 이상향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먼저 192x312cm 크기의 바탕을 10칸으로 나누어 두 가지 색 과슈(gouache, 수용성의 아라비아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수채물감)로 칠했다. 그 위에 하얀 도화지를 자른 다양한 모양을 붙였다. 간단하다. 게다가 색도 같은 계열을 사용했고, 바닷속 생물과 해조류가 문양처럼 반복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마티스가 타히티 여행에서 얻은 영감을 형태로 옮기는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모든 형태를 이렇게 단순화하기까지 300마리가 넘는 새를 키우며 행동을 관찰했고,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기까지 200번도 더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일흔이 넘는 나이에 몸이 몹시 아팠을 때다.

<달팽이(1953)>

조수가 과슈로 칠한 색종이를 건네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라 캔버스 위에 배치하면서 그는 "가위는 연필보다 훨씬 감각적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화, 미니멀리즘이다. 현대 미술이란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완성도가 더 높아졌다. 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추상 미술을 따라 한 것 같지는 않다. 추상화(抽象畵)란 대상이 나타내고 있는 기본적인 점, 선, 면, 색채를 추출하여 단순하게 구성한다. 그러나 그는 1947년 메모를 통해 “요즘 유행하는 이 구상 예술과 비구상 예술 사이의 구분법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리고 "추상의 뿌리는 실재에 있다"는 입장이었으니, 온전한 추상 작품을 추구했다고 볼 수 없다. '추상화된' 작품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죽기 1년 전 같은 방법으로 제작한 <달팽이>도 마찬가지다. 최초 ‘현실에 뿌리박은 추상적 패널’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와 관련 마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달팽이로부터 자연을 끌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shell이 떠올랐다.”


달팽이를 그냥 옮겨 담으려 한 것이 아니라, 달팽이를 통해 자연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자연 shell은 조개나 달팽이 껍데기(집)로, 나선형 모양을 연상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의 종이 오리기 작품은 처음부터 추상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탄생한 작품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여하튼 미술사적으로 구상과 비구상 사이의 과도기적 타협점이었다. 


그는 1948년부터 방스에 있는 로제르 성당의 벽과 창문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추진했다. 모니크 부주아란 수녀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그녀는 마티스가 1942년~1943년 니스에서 요양할 때 <재즈(1943)>의 종이 오리기를 도와주었던 바로 그 간호사였다. 최후의 작품이 될 거라고 예감한 그는 나머지 힘을 모두 쏟았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유리를 통과하는 빛이 중요한 요인이기에 선 드로잉과 색채 대비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쓰러졌다. 1951년 6월 25일 수녀들을 위한 성당이 니스 주교의 손으로 축성되었다.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생명의 나무(1948~1951)>과 유작 중 하나인 추상 작품 <구성(벨벳, 1947)>의 줄진 장방형의 기본 형태를 <폴리네시아, 바다>에서 가져왔다. 이제 여든네 살의 나이로 귀천하기까지 3년의 세월이 남았다. 그는 푸른 누드 연작(Ⅱ~Ⅳ)(1952)을 잇달아 작업한 후 1953년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작품성 못지않게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후반의 추상화가들, 특히 애드 라인하르트와 마크 로스코, 시몽 한타이, 클로드 비알라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티스는 1954년에 니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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