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인영 Oct 27. 2022

야수파의 탄생과 앙리 마티스

아방가르드(Avant-garde, 前衛藝術)는 기존 예술에 대한 인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개념을 추구한다. 미술에서는 1905년과 1910년 사이에 2대 혁명이 일어나면서 출발했는데, 야수파와 입체파의 등장이 그것이다. 모두 프랑스 화단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혁신이지만,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우주와 인간의 숨겨진 자아를 반영했으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프로이트·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무관하지 않다. 

야수파가 먼저 출발을 선언했다. <화가의 노트>에서 “회화는 결국 표현이다”라고 주장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프랑스 표현주의의 선구자이자 야수파로도 분류된다. 야수파는 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905년~1908년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변형을 추구함으로써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화가들을 일컫는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내면의 표현과 감정의 해방이라는 면은 서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에서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따라 결을 달리한다. (제목 그림; <티셔츠 입은 자화상(1906)>


1905년 파리에서 '살롱 도톤느(Salon d’Automne)가 처음 열렸다.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단체들이 그 이름에 '살롱'이라는 말을 넣곤 했다. 살롱 데 앙데팡당, 살롱 드라 로스+크루아 등이다. 살롱 도톤느는 가을에 개최되었기에 붙은 이름이다. 마티스, 블라맹크, 드랭 등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는 젊은 화가들의 그림이 마르케의 고전적인 조각상과 함께 전시되었다. 이를 보고 비평가 루이 보셀이 "레 포브(Les Fauves, 야수 또는 야만)의 무리에 둘러싸인 도나텔로"라는 말함으로써 야수파란 이름이 탄생했다.

 

<모자를 쓴 여인(1905)>

마티스는 인상주의 화가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의 재현에 반기를 든 고흐와 고갱, 그리고 세잔의 구성을 따랐다. 이때 출품한 그의 대표작이 <모자를 쓴 여인>이다. 미국의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이 구입한 이 작품은 색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부숴버렸다. 아니, 해방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그러나 오빠 레오 스타인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지저분한 얼룩"이라고 평했다. 얼굴에 피부색과 다른 빨강, 초록, 핑크를 썼다. 원색이 주는 본능적 느낌에 충실하여 사실성을 버리고 자신의 색을 선택한 것이다. 전체 색들 간에 조화도 없다. 그러나 색으로만 입체감과 감정을 전달하려 했다. 밝은 파란색, 녹색, 장미색과 오렌지색으로 꾸민 그녀의 실제 입은 옷은 검정이었다. 특히 초록은 코와 입술, 그리고 턱선 등 부피감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마의 거친 초록 띠는 모자 가장자리가 만든 그림자였다. 그는 회화를 색채로 정의했다.


"회화란 어떤 대상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따라 모인 색채로 덮인 평탄한 면이다."


<화사함, 고요함과 쾌락(1904)>과 <삶의 기쁨(1906)>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란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심지어는 조롱과 함께 찢어버리려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모델이었던 자기 아내 아멜리도 작품성과 관련해서는 마티스 편에 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901년 절친했던 블라맹크와 함께 고흐 전시를 본 후 미술에 대한 눈을 떴다. 그리고 생트로페(Saint-Tropez)에서 시냐크와 함께 작업할 때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저녁의 미풍(1893~1894)에서 영감을 받았다. <화사함, 고요함과 쾌락>이 탄생했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실린 ‘여행에의 초대’ 중 유명한 구절로, 그의 문학적 소양을 엿볼 수 있다. 점묘법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도가 크로스의 것을 닮았다. 그러나 색채가 무척 화려하고 쾌락적이다. 2년 후 점묘법을 걷어내고 야수파의 색깔을 분명히 나타낸 <삶의 기쁨>을 그렸다. 그는 그림이 삶에 기쁨과 위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화사함, 고요함과 쾌락>을 샀던 시냐크는 색채 주위에 그어진 선을 보고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이렇게 탄식했다.


“지금까지 나는 마티스를 높이 평가해왔다. 그러나 그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다. (···) 아! 파스텔 분홍색이라니.”


<열린 창(1905)>과 <마담 마티스(혹은 녹색 선, 1905)>

모범생이었던 마티스의 그림이 이렇게 거칠어졌다. 그의 원색과 강한 감성으로 시각 혁명을 가져왔다. 근대 미술의 혁신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야수파는 특정 사조라 할 만큼 조직적이지 못했다. 다만 ‘색채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 개념에 반기를 든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열린 창>도 1905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작품이다. 일생에 걸쳐 반복한 창문 구도다. 바깥 풍경도 낯 모를 세계를 암시하는 듯하지만, 창틀 역시 비현실적인 강렬한 색채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색감을 사용한 초상화 <모자를 쓴 여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다만 창밖 콜리우르 항에 배가 뜬 풍경은 함께 작업한 드랭의 그림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입체파의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의 작품에서도 발견되는 유사성이다. 

마티스의 작품은 기교 이상의 차원이었다. 그는 자연의 색을 재현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먼저 대상과 충분한 교감을 시도했다. 통찰력이 생겼다. 스승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한테서 배운 태도다. 원색의 채도와 명도에 따라 원근감과 명암, 질감, 양감(量感)을 전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따뜻하고 춥고, 심지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담았다. 마치 자기 내면을 색으로 일러주는 듯하다. 사람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마담 마티스>에서는 얼굴 전면의 녹색 선을 중심으로 그림을 이등분하여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역시 원색만으로 형태와 입체감을 표현했는데, 중요한 점은 전체적으로 보색 관계를 이용하여 아내의 내면을 담았다는 점이다. 


<춤(1910)>
<음악(1910)>

마티스의 색의 배합은 <춤>에서 잘 나타난다. 색채는 빨강, 파랑, 초록, 즉 빛의 삼원색으로 이루어졌다. 배경은 파란 하늘과 초록 언덕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붉은색 다섯 명의 댄서가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 이렇게 단색을 사용하여 대상의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서로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인체에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앙에 두 사람이 떨어져 있는 손을 이으려는 대각선 구도에서 간절함과 함께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의 단골 수집가인 러시아 부호이자 컬렉터인 세르게이 시츄킨의 의뢰로 탄생한 걸작이다. 그는 자신의 3층 저택 계단에 모두 세 작품을 설치할 예정이었다. 

마티스는 <춤>과 짝을 이룰 <음악>을 그렸다. 둘이 합쳐야 공명을 이루기 때문이다. <음악> 역시 <춤>에서와 같이 빛의 삼원색과 다섯 명의 등장인물로 구성했다. 하지만 <춤>처럼 역동적이기보다는 우주와 인간에 관해 성찰할 수 있는 작품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분한 분위기와 개개인의 고립감을 형상화했다. 그는 스케치 없이 바로 작업했기에 작품에서 수없이 고친 부분이 발견된다. 원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고민한 흔적으로, 이렇게 불후의 2부작이 탄생했다. 지금은 ‘상상력 발전소’라 불리는 파리의 빨레 드 도쿄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은 <강가의 수영하는 사람(1916)>이라고 하는데,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