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하기 한 달 전쯤 프리몬트에 거주하는 큰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곳에 도착하면, 꼭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샌프란시스코 언덕을 오르내리는 전차(케이블카), 금문교, 현대미술관, 그리고 페블 비치를 꼽았다.
사실 5년 전쯤 골프를 놓았다. 아내와 함께 칠 기회가 별로 없는데 혼자 다니기가 민망했다. 그리고 티업 시간이 새벽이면, 전날 잠자리가 불편하고 수면 패턴이 깨진다. 이따금 이라도 연습을 꾸준히 해주어야 하고···. 이래저래 귀찮아졌다. 게다가 다른 재밋거리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골프를 접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대했던 미국 1위, 세계 3대 명문 골프장인 페블 비치는 생전에 꼭 한번 구경하고 싶었다. 이곳에선 며칠 전에도 LPGA US OPEN이 열렸다. 미국을 브랜드로 하는 대표적인 골프장이며, 코스를 설계하면서 훌륭한 경관과 난이도가 조화를 이루었다는 의미다.
오랜 기간 세계적인 선수들이 모여 매 홀 전략적 선택을 달리하면서 극적인 승부의 역사를 써나갔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다는 것은 직접 골프를 치지 않아도 당시의 역사를 함께 하는 가슴 뛰는 일이 될 것이다. ‘버킷 리스트’였다.
어느 2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페블 비치를 제목으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런데 “아빠가 버킷 리스트라고 하여 모시고 왔지만,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면서 골프장이 아닌 해변 사진만 잔뜩 올려놓았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상사가 다 그렇다. 본인이 재미와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는 공감이 뒤따르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그녀는 효녀가 분명하다. 흐흐흐.
몬터레이 카운티에 위치한 페블 비치는 프리몬트에서 족히 4시간 거리에 있다. 차는 캘리포니아주 1번 고속도로를 달렸다. 비교컨대 태평양 건너편 대한민국 동해안 7번 국도와 같다. 길 자체가 관광 코스다. 맑은 날, 북대서양 한류가 이쪽을 지나면 운무가 낮게 퍼지면서 자동차가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듯하다.
산타크루즈에서 좌회전 후 몬터레이 카운티로 들어섰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첫 글에서 언급한 스콧 매켄지의 노래가 이곳에서 열린 국제 대중음악 축제 홍보를 위해 만들어졌다.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가볍게 식사를 한 후 먼저 ‘빅 서(Big Sur)’로 향했다.
1번 도로가 완성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 길이 꼬불꼬불하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려고 마을 진입로에 위치한 빅스비(Bixby) 다리 앞에서 차를 멈췄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을 연결했는데, 아내와 나는 동시에 스페인 남부 론다의 다리를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계곡이 가파르고 다리 길이가 길지만 고풍스러운 멋에서는 한참 못 미친다. 대신 태평양을 연하고 있어 가슴이 트인다.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까보다로까(CABO DA ROCA)에서 만난 대서양의 망망대해와는 또 다른 감동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캐멀-바이-더-씨(Carmel By The Sea)’를 들렀다. 캐멀 비치와 마을 모두 소박한 매력을 지녔다. 일몰 전 해변의 모습이 한가롭다. 중심지 상가 마을은 기대하지 않았던 수채화처럼 다가왔다.
작은 그리스 식당에서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남녀의 모습이 미소 짓게 한다.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렇게 만끽하는 자유는 언제나 보기 좋더라.
페블 비치 골프장 관광도 같은 맥락이다. 회원 중심으로 운영하는 골프장은 그린피가 약 700달러다. 대한민국에 사는 내가 이곳에서 직접 즐기기에는 예약과 비용에서 무리다. 그러나 이곳에서 남이 골프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이튿날, 아쿠아리움으로 유명한 마을을 먼저 들렀다.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마을 구경만 했다. 라스베이거스와 샌프란시스코가 록 음악의 중심지라 그런지 가죽점퍼 차림의 터프한 오토바이족이 자주 눈에 띈다. 늙어가면서 저렇게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는 것도 멋진 인생이지 싶다. 술 마시고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치 이야기로 핏대 올리는 것보다 백배 낫다.
다음 날 페블 비치로 들어섰다. 그런데 통행료가 무려 11달러다. 하지만 “이건 뭐지?”라는 찜찜한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스패니시만(Spanish Bay)을 따라 해안선 17마일의 드라이브 길이 우리 가족을 반겼다.
이곳엔 울창한 삼림과 해안을 중심으로17개의 맞춤형 포인트를 개발해 놓았다. 각 포인트 모두 사진 찍기 좋은 경관을 갖췄다. 특히 12번째 ‘THE LONE CYPRESS’는 이곳 대표 장소로, 골프장 로고로도 사용된다. 몬터레이 사이프러스는 유럽의 것과 달리 생김새가 독특하다. 나무가지가 하늘 위로 뾰족이 솟구치지 않고, 옆으로 펼쳐졌다.
15번째 포인트가 바로 골프장 내 방문객 센터다. 그곳엔 간단한 기념품이 마련되었다. 난 모자를 골랐다. 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었던 우리는 클럽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음식을 시켰다. 창밖으로 18번 홀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음식의 맛과 분위기, 그리고 종업원의 서비스가 어우러져 매우 만족스러웠다.
좋은 기분이 두 배로 상승한 것은 계산할 때였다. 큰 애의 꼼꼼함이 빛났다. 35달러 이상 음식을 먹으면, 통행료를 환불해 준다는 규정을 찾아냈다. 혹여 다음에 투어 계획이 있으신 분은 잊지 마시라! 크지 않은 액수라고 가볍게 대할 수 있겠지만, 모르고 봉 노릇을 하는 것보다 낫다.
식사를 끝내고 18번 홀 내 라운딩하는 골퍼들의 모습을 주변 배경과 엮어 사진을 찍었다. 아내는 한 팀의 마지막 그린 플레이를 구경했다. 그중 한 골퍼가 벙커를 오고 가면서 모랫바닥을 패대기친다. 왕년에 나도 다반사였기에 그 심정 잘 안다. 그 골퍼는 먼저 그린에 공을 올린 동료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었다.
“조금 옮겨 놓고 치면 안 되겠냐?”
동료 중 한 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저기 숙녀분이 보고 계시니 안 된다”며 아내를 가리켰다. 짓궂지만, 재치 있는 골퍼다. 팀원 모두가 한바탕 웃으며 라운딩을 끝냈다. 내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래! 골프칠 땐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 비싼 돈 내고 스트레스까지 받는다면, 그건 자가당착이다. 덩달아 나도 하루가 즐겁게 마무리했다.
여우가 맛있게 생긴 포도송이가 높이 달려서 먹을 수 없게 되자, 혼자말을 했다.
“저 포도는 실 거야.”
그런데 여우는 운 좋게 그 포도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셨다. 이가 시리도록.
남이 행복할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이 생겨야 진짜 프로다. 적어도 오늘, 나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