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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25. 2024

'세상 끝 열차'와 티에라 델 푸에고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티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탐방 

오늘은 그림 한 점을 먼저 감상 후 본격적으로 여행 이야기로 들어가자. 영국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후기작 <비, 증기 그리고 속도감-위대한 서부행 철도(1844)>이다. 그는 평생 폭풍우, 대형 화재와 같은 인간으로서 손쓸 도리가 없는 드라마틱한 주제를 다루어 왔다. 대자연에 대한 외경이다. 그랬던 그가 부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인류의 과학 문명을 예찬했다.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담은 최초의 그림이다.

터너는 기차의 속도감을 표현하기 위해 왼편 오래된 인도교와 대비, 가파른 각도로 철교를 표현했다. 그리고 바탕색을 뚫고 나오는 다리와 그 위를 지나는 증기기관차를 검은색으로 뚜렷이 처리했다. 특히 기차의 선두 부분은 선명하게, 뒤로 갈수록 엷게 색칠하여 질주감을 드러냈다. 

당시 사람들은 시속 약 30km의 기차 속도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빠르다고 여겼다. 하지만 터너는 작업을 위해 열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10분 동안 속도감을 체험했다. 목숨을 걸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로선 상당한 모험이었다. 


'세상 끝 열차' 출발 역사

시속 30km라? 티에라 델 푸에고 산 자락 '세상 끝 열차'의 속도가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터너의 기차와는 결이 다르다. 인류 문명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격한 노동의 한이 담겼다. 조그만 증기 열차는 1910년부터 살을 에는 차가운 날씨에 죄수들이 깊은 산속에서 힘들여 벌채한 나무를 실어 날랐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한 목재로 오늘날의 우수아이아를 건설했다. 그리고 보면, 상당수의 유명 관광지가 척박한 환경에서 가시 돋은 살을 뚫고 태어난 선인장 꽃을 닮았다.


우수아이아는 파타고니아 지역 중 최남단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여행담을 위해서 우리 귀에 익숙한 파타고니아에 대한 개괄적 소개가 필요할 듯하다. 파타고니아는 남위 40도, 네그로강 이남 지역 약 110만㎢를 말한다. 한반도 면적의 약 5배인 이곳 영토는 안데스산맥을 중심으로 오른편 아르헨티나가 90%, 왼편 칠레가 10%를 차지한다. 

우리 일행의 여행 경로는 자연환경이 척박한 칠레를 피해 평원이 많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를 택했다. 참고로 파타고니아는 키가 160cm 정도의 마젤란 원정대원이 180cm의 훨씬 큰 키를 가진 원주민 테우엘체족 신발 자국을 보고 '파타곤(patagón, 큰 발)'이라는 부른 말에서 비롯되었다.


피에라 델 푸에고 국립공원 내 풍경

우수아이아 시내에서 약 12km 떨어진 지점에 피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산이 위치한다. 안데스 산맥 끝자락 산으로, 피에라 델 푸에고는 '불의 땅'이란 뜻이다. 예전 원주민들이 추위에 떨며 항상 불을 피우고 살아야 했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상대적으로 사람 손이 미치지 않아 주변 산림은 잘 보존된 이곳은 20세기 들어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우수아이아 전반적인 물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 두 배 이상 비싸다. 대신 소매치기는 없어 마음 편안한 여행이 가능하다.


기차 여행이 시작되었다. 대합실과 탑승구에서는 죄수 복장을 한 모델들이 나무도끼를 든 채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한다. 이들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진 촬영을 함께한 후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열차는 과거의 신분을 지워버리고 칙칙폭폭, 깜찍한 모습으로 변신한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용으로 개조된 열차 한 칸에 네 명이 둘씩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앉는다. 철로 간격이 좁아 살살 달래 가며 열차가 움직이기에 불편 없이 편안하다. 질주감보다는 차라리 1960년대 대한민국 경춘선과 같은 낭만이 숨 쉰다. 


오른편 역사 내 상가 기념품

탑승 전 죄수 복장의 모델과 어울려 유쾌한 동작을 취하며 사진을 찍던 중국인 청년 두 명이 공교롭게 맞은편에 앉았다. 그중 콧수염을 한 친구가 배우 주윤발을 연상시킨다. 잠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그가 스페인에서 학위를 받고 화웨이에 취업하여 현재 멕시코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가 청해 그가 건네준 화웨이 핸드폰이 날렵했다. “애플폰보다 나은 것 같다”라고 슬쩍 추켜세우자,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솔직하다. 그리고 유쾌하고 예의가 바르다. 기차 역방향에서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자기 자리와 바꾸어 주겠다고 제의했다. 정말로 괜찮다며 사양했다. 

결혼한 지 1년 되었으며, 스페인 유학 시절 한국인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그의 사진을 찍자 “혹시 보내줄 수 있으면···”이라고 말문을 열며 메일 주소를 건넨다. 여행이 끝나고 귀국하는 즉시 사진을 보냈다. 선진 대한민국 사람의 품위를 지켰다. 옆에 앉은 그의 어릴 적 친구는 무심한 척 스마트폰만 들여보다가 술 이야기가 나오자 씩 웃는다. 나름대로 음주에는 일가견이 있나 보다. 


기차는 두 번 정차하여 승객들이 잠시 산보와 주변 경관을 즐길 기회가 제공하였다. 그리고 종착 지점에서 다시 버스로 잠깐 갈아타고 국립공원 초입에 도착했다. 멀리 안데스산맥이 보이는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트래킹, 캠핑, 심지어 스킨스쿠버를 즐긴다.


최남단 우체국 내,외부

공원 내 바닷가에 위치한 최남단 우체국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는 관광객으로 틈이 없었다. 여유를 갖고 엽서를 쓰기엔 사람들이 너무 붐볐다. 얼른 나와 주변을 가볍게 걸으며 카메라에 아름다운 풍광을 담았다. 상쾌한 공기와 짙은 초록과 파랑으로 인해 눈이 시원해졌다.


바닥에 온통 민들레가 뿌려졌다

개인적으로 풍경 사진은 사람이 들어 있을 때 보다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 중 제일 마음에 드는 한 컷을 얻었다. 열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찍다가 얻어걸렸다. 중년의 외국인 한 쌍이 트레킹 하는 모습이다. 건강한 걸음걸이가 이곳 풍광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참 보기 좋았다. 사진엔 나의 부러운 시선도 함께 담겨 있다. 젊은 시절, 나는 무엇에 그렇게 쫓기듯 바쁘고, 또 바쁘게만 보내야 했을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낼 수 있었을 텐데···”라는 회한이 스친다.


여행할 때 생각은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로 오고 간다. 그리고 준비 과정과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통해 생각이 거듭 태어난다. 그러니 나이 먹은 이보다 젊은 사람들이 여행을 많이 해야 생산적이다. 다행히 아들 애가 여행을 좋아한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격려한다.

 

“많이, 넓고, 깊게 보아라. 여행은 키우면서 채우는 확충(擴充)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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