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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01. 2024

엘 찰텐에서 ‘세로토레’ 트레킹을

칼라파테

남아메리카 최남단 우수아이아를 찍은 후 행로가 대륙 북쪽으로 꺾였다. 1시간 20분 하늘을 날아 칼라파테 공항에 도착했다. 노란 꽃과 진보라색 열매를 맺는 자생식물 칼라파테가 지천으로 깔려서 이름 붙은 지명이다. 약용으로도 쓰는 칼라파테 열매를 먹은 사람은 이곳 파타고니아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난 열매로 만든 아이스크림조차 먹지 못했다. 하지만 먹었다고 해도 어쩐지 죽기 전에 한 번 더 이곳을 찾을 기회가 없으리라 예감한다. 로마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진 지도 10년 가까이 됐는데 아직 근처에도 못 가보았으니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다. 그러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여겨야 한다. 일정 하나하나에 성실하게 즐기면서 그 감동을 최대한 마음속에 새기고 소화해내야 한다. 


차창 너머로 찍은 주변 풍경(왼편)과 과나꼬

공항에서 버스로 목적지 옐 찰텐(El Chaltén)으로 이동했다. 엘은 영어 'the'에 해당하고, 찰텐은 ‘연기 나는 산’을 의미한다. 산봉우리가 구름에 자주 가려 화산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3시간 30분이 걸린 220km 버스 길이 무척 지루했다. 

이곳은 나무가 없이 풀만 듬성듬성한 스텝지역이다. 민둥산으로 둘러싸인 단조로운 평원이 이어졌다. 인가가 없고, 버스가 지나는 길 주위로는 자갈과 흙모래만 보인다. 마치 사막처럼 척박하다. 도로 옆으로는 길게 철조망 울타리가 쳐졌다. 아르헨티나에서 발달한 목축업의 흔적이다. 그런데 그 철망엔 전기가 흐르는가 보다. 도로를 건너려던 과나꼬 사체가 제법 많이 발견된다. 과나꼬는 대륙이 붙었을 때 아프리카로 건너가 낙타로 진화한 야생동물이다. 


구름에 가려 화산처럼 보이는 피츠로이 산, 왼편 끝에 뾰족한 세로토레산이 보인다
숙소 주변 마을 풍경

마을 입구에 도착하면서 다 왔다는 생각에 처음 대면한 해발 3,405m 피츠로이산이 반가웠다. '산악인의 로망' 피츠로이는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 5대 미봉 중 하나다. 등산용품 전문점이자 사회적 기업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로고가 바로 피츠로이산 봉우리다.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주의 작은 산간 마을 엘 찰텐에는 약 1,600명의 주민이 산다고 한다. 저녁 무렵,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막 불이 켜진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TV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평온한 풍경으로, 예쁜 마을과 잘 어우러졌다. 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여독을 풀 겸 시원한 맥주 한 잔 들이켜고 싶다.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그러나 짐을 풀고 샤워를 끝내자, 이내 잠이 몰려왔다. 내일 아침, 여행 중 가장 긴 거리의 트레킹을 의식해서 이불을 덮고 일찍 잠을 청했다.

 

세로토레의 날카로운 봉우리

이곳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는 피츠로이(21㎞, 9시간 소요)와 세로토레(24㎞, 8시간 소요) 두 군데다. ‘피츠로이’는 1830년대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 당시 선장이었던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PitzRoy)에게서 따왔다. 비글 해협에서 언급한 찰스 다윈과 연결된 인물인데, 무슨 연유로 이름이 붙여졌는지는 모르겠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찰텐’이었다.


‘눈과 바람이 만든 산’ 세로토레(Cerro Torre)는 피츠로이 산 서쪽 아르헨티나와 칠레 모두의 영역에 위치한다. 두 국가의 경계가 아직도 명확하게 획정되지 않았다. 산악계에서 절경으로 소문난 산이다. 하지만 전문 등산인도 정상에 오르기가 몹시 거칠다고 한다 

가장 무난한 경로로도 정상까지는 약 12시간 정도 얼음 바닥과 거센 바람을 뚫고 가야 한다. ‘슈퍼 알피니즘’, ‘지구 최후의 등정지’, ‘악마의 산’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우리를 인솔한 현지 전문 산악인도 1년에 한 번 정도만 뾰족한 봉우리를 암벽 등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토레 전망대까지다. 일반인이 세로토레를 즐기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할 듯하다.

 

아침 공기가 신선하다. 트레킹은 두 조로 나누어 진행했다. 중간 전망대에서 되돌아오거나, 토레 호수까지 다녀오는 방안이다. 당연히 후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비싼 돈 내고 왔고, 다시 오기 어렵기에 볼 건 다 보고 가야겠다는 각오다. ㅎㅎ

하지만 트레일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 중에서 불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팔랐나 보다. 결국, 처음 선택했던 것보다 많은 인원이 자신감을 잃고 전망대에서 되돌아갔다. 어쩌면 동참했을지 모를 불평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다. 젊었을 때라면, 새 차 사는 데 보탰을 경비를 들여 자처한 고생이다. 일부러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장 큰 강점이 오래 달리기다. 나도 한때 마라톤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은퇴 후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와 아내와 함께 세계 유명 마라톤에 참가할 기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왼 무릎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크게 망설이지 않고, 마라톤을 중단했다. 고개를 돌려 보면, 마라톤 말고도 즐길 일이 얼마든지 남았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대체한 운동이 등산이다. 적어도 1주일에 두 차례 정도 청계산 등반을 즐긴다. 어쩌다 분위기를 바꿔 대공원 산림욕장길을 걷든지, 아내와 함께 테마공원에서 집에서 준비해 간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그곳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 보면, 이 또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간은 시간 배분에서 나름 가치관에 기반한 경제성으로 우선순위를 정한다. 나에겐 지금의 일상이 가장 만족스럽다. 운동 말고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즐겁다. 이수역 내 중고서점에서 10만 원 정도 책을 사면, 한 달이 즐겁다. 그리고 짬짬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린다. 글을 쓰다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접한 취미가 사진 촬영이다. 

이번 남미 여행길에서도 무슨 사진작가라도 된 양 무거운 풀프레임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때론 무리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성과를 기대하고 시작한 취미가 아니다. 그냥 제멋에 겨워하는 짓이다. 그리고 사진 촬영이 깊이 몰입하지 않는 편이다. 핸드폰 사진을 조금 넘어서는 정도. 지금 나는 생각하기에 따라 세상엔 즐길 일이 산처럼 쌓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우윳빛 개울물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다.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정작 개울을 발견하기 어렵다. 물 색깔이 짙은 우윳빛으로, 주변과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생경하다. 물의 색깔은 내포된 광물자원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이곳엔 대한민국에 없는 자원이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마른 목을 축이기에는 부적절할 것 같다.

 

다행히 6시간 넘게 걸린 트레킹이 전반적으로 순조로웠다. 이국적인 풍경과 꽃을 볼 때면, 숙소로 먼저 들어간 일행 몫까지 모조리 눈에 담았다. 내려가는 중간중간 스치는 사람들과 “올라”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한 외국인이 “곤니찌와”라고 답례한다. 우리 일행을 일본인으로 착각했나 보다. 

그러자 일행 중 한두 분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동양인이라면, 중국인과 일본인을 떠올리는 그들에게 대한민국인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괜찮겠다 싶어 나도 따라 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토레 호수에는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조각이 일 년 내내 떠 있다. 사진을 찍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싸가지고 온 도시락을 먹었다. 그늘이 없어 뜨거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왔던 길로 하산했다.


통상 내려가는 길은 짧게 느껴지는 법인데, 어쩐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오를 때 풍경에 취해 힘든 줄 몰랐나 보다. 상대적이다. "예쁜 여자와 공원 벤치에서 대화를 나눌 때 1시간이 1분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을 때는 1분이 1시간처럼 더디게 흘러가는 것과 같다"라고 아인슈타인이 기자들에게 설명했던 그 상대성 이론이다. 

그래! 시간은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극일 뿐이다. 확장하면, 세상사 모두가 상대적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곳곳에 산재한 야생화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짧지만 임팩트 강한 시, <그 꽃>이 생각났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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