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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08. 2024

페리토 모레노 빙하와 원시

페리토 모레노 빙하
태국의 왕에게 이국의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던 네덜란드 탐험가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고향의 겨울에 관해 말했다. 언 강과 호수 위를 걸어 다니고, 스케이트를 타며, 심지어는 마차도 다닐 수 있다고. 왕은 노발대발했다. 곱게 이 말 저 말 들어주니 이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다며 ‘사기꾼 같은 놈’이라고 했다.


사계절이 뚜렷한 대한민국 사람으로서는 네덜란드 탐험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빙하는 겨울이 있는 우리로서도 매우 이국적인 체험이다. 특히 규모가 주는 심리적인 효과가 작용하는 웅장함을 느끼려면, TV 화면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시간 여행을 통해 빙하가 선물하는 원시와 직접 대면하고 싶었다. 물론 대자연의 더 큰 숭고를 체험하려면, 극지방 빙산이 최고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겐 파타고니아에서 만나는 빙하가 차선이다.


기념품을 포함한 칼레파테의 대형 잡화점
칼레파테 시내 풍경

파타고니아는 서쪽으로 안데스산맥 넘어 빙하와 설산을, 동쪽으로는 고원과 평원을 지나 대서양까지 이어진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체험은 단연 빙하 관광일 것이다. 엘 찰텐에서 트레킹했던 우리는 엊그제 비행기에서 내렸던 엘 칼라파테(El Calafate)로 다시 돌아왔다.

칼라파테는 인구 2만여 명이 거주하는 소담스러운 도시다. 시내 중심지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넓은 편이 아니지만, 양편 바깥 차선으로 주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관광지라는 특성에 맞춰 음식점과 매장들이 전체적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졌다. 유럽처럼 선술집 바깥 탁자에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자 거리가 아연 활기를 띤다. 골목 한편 'ARTESANOS'이라는 쇼핑 구역엔 수공예 가게들이 모였다. 은과 가죽 팔찌, 목조 인형, 털모자 등을 파는데, 제법 인파로 북적인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에 쌓인 눈

이곳 로스 글라시아레스(Los Glaciares) 국립공원은 47개의 큰 빙하를 품고 있다. 30%가 얼음이 덮여 있는 공원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남쪽 아르헨티노 호수(Lago Argentino)와 북쪽 비에드마 호수다. 어제 들렀던 세로토레가 비에드마 호수 북쪽에 위치한다.

한편 아르헨티노 호수의 대표적인 빙하가 오늘 찾아가는 ‘페리토 모레노(Perito Moreno Glacier)’다. 3만 년 전에 형성된 빙원의 크기가 414㎢로, 부에노스아이레스시 면적과 맞먹는다. 자연이 만든 걸작으로, 남극과 그린란드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얼음층이다.


빙하 관광은 두 가지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하나는 발에 아이젠을 차고 직접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에서 1시간 30분 동안 미니 트레킹을 한다. 트레킹을 마친 후 빙하를 부수어 얼음 위스키, '온더록스'를 만들어준다. 몸으로 부딪치는 프로그램이다. 다른 하나는 유람선을 타고 공원 내 가장 큰 웁살라 빙하 등을 둘러보고, 모레노 빙하 전망대에서 하선하는 코스다. 눈이 즐겁다.

나는 미니 트레킹을 원했다. 하지만 사고 등을 염려한 현지에서 65세 이상 고령자에겐 불허한다. 체력이 아니고 숫자로 제한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정한 세월을 탓할밖에. 하지만 두 코스를 모두 체험하지 않는 한 어느 것이 더 좋은지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야말로 자기만족이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서둘러 조식을 마치고 아르헨티노 호수 ‘라 솔레다드’ 선착장에 도착했다. 인성까지 훌륭한 배우 강하늘이 2020년 TV에 나와 감탄을 쏟아냈던 바로 그 호수다. 국기를 제작할 때 호수의 풍경을 모티브로 삼아서인지 주변 색채가 아르헨티나 국기를 닮았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아래 에메랄드색 호수... 호수의 물은 산타크루스 강을 거쳐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옷을 겹쳐 입고 장갑까지 끼고 단단히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빙하의 찬 기온이 바람에 밀려오는지 몹시 춥다. 승선 후 선내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힘차게 출발한 배는 호수 구석구석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빙하를 만나면, 방향을 바꾸면관광객이 이동하않고도 고루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이윽고 멀리 첫 빙하가 눈에 들어왔다. 선내에서 동시에 “이야!”하는 감탄사가 터졌다. 그리고 말릴 사이도 없이 우르르 바깥으로 몰려 나간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나가면, 사람에 치여 사진 찍기가 어렵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더 큰 빙하를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지나자 많은 사람이 차가워진 손을 비비며 선내로 되돌아온다. 그때쯤 슬슬 몸을 일으켰다. 뱃머리로 가려하니 정면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몸이 크게 휘청거린다. 사진은 물론, 제대로 감상하기에도 버거웠다. 배의 옴폭 파인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시선이 희고 옥빛 빙하 쪽을 향했을 때 여유롭게 셔터를 눌렀다.


열심히 감상과 감탄을 거듭하다가 갑자기 “인간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화두가 생각났다. 철학자 플라톤이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동굴 속 벽에 비친 그림자라고 했던 그 주제다. 플라톤이 말하는 그림자가 총천연색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다. 

사실 38억 년 생명체 역사에서 눈(眼)이 만들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5억 4,000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일어난 폭발적 진화 때 일이다. 이전에는 피부나 냄새로 세상을 인식했으며, 눈에 빛들어오자 비로소 암흑천지에 색깔이 입혀졌다는 의미다. 

하지만 생명체마다 인지하는 색의 스펙트럼이 각각 다르다. 동물 중에 곤충과 새는 인간에 비해 더 많이, 포유동물은 상대적으로 더 적은 색을 본다. 그리고 인간의 눈전체 전자기파의 10조 분의 1만 인식할 뿐이다. 가시광선이라 한다. 그나마 눈으로 것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뇌로 전달한다.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니 각자 눈으로 본 세상만이 제대로라고 고집부리면, 난센스가 된다.

  

르 코르비지에의 4평짜리 오두막집 '카비뇽'을 연상케 하는 숙소(중앙)

찬란한 아름다움에 몰입하지 못하고 굳이 이런 상념을 떠올리는 나는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존재가 분명하다. "가벼워지자, 가벼워지자" 주문을 건다. 이때 유람선이 마음을 다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마지막 거주민이 철수한 이후 무인도가 된 섬에 하선했다. 

방목, 번식한 소들을 관리했던 숙소(PUESTO LAS VACAS)만이 덩그러니 남은 섬이다. 하지만 비글 해협에서 내렸던 작은 섬과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심지어 산책이 가능할 정도의 해변이 고즈넉이 펼쳐졌다. 낭만적이다. 탑승객들은 삼삼오오 나뉘어 사진 촬영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일행 중 유일한 누님(오른편). 마음씨도 고왔던 그 분의 멋진 인생 샷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원 내 규모가 가장 큰 웁살라 빙하에 이어 다시 승선 후 가장 높은 스페가지니 빙하 등을 감상했다. 여름인데도 한기가 몰려왔다. 꾀를 내어 실내로만 아래위층을 오가며 다양한 방향에서 옥빛 빙하를 카메라에 담았다. 아니, 감동을 담았다.


전망대 주변에 핀 '불꽃'

준비해 온 점심 도시락을 선실에서 먹고 난 후 드디어 페리토 모레노 빙하 전망대에서 하선했다. ‘페리토’는 전문가를 뜻하며 ‘모레노’는 1877년 빙하를 처음 발견한 프란시스코 파스카시오 모레노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거대한 빙하를 직접 조망하자, 그 생성과 소멸을 확연히 이해할 수 있었다. 


먼 옛날 안데스산맥이 솟아올랐고,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산 위로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쌓여 얼음이 되었고, 계속되는 하중을 못 이기면서 먼저 쌓인 얼음층이 아래로 밀려났다. 하루에 중앙 부위가 2m, 양편 끝이 40cm씩 움직였다. 이렇게 높이 60m, 폭 5km, 길이 35km의 모레노 빙하가 탄생했다.


빙벽이 무너진 곳으로 물이 흐르고...

모레노 빙하는 반대편 해안에 있는 템파노스 해협을 막아 버렸다. 그 결과, 호수 상류의 수위가 급격하게 상승해서 하류보다 37m 나 높아졌다. 그러나 날씨가 풀리면서 브라소 리코를 통해 흐르는 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빙하 동편 중앙 빙벽이 터지고, 지금처럼 물이 아르헨티니노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이때 엄청난 물이 하류로 쏟아지면서 내는 얼음 깨지는 소리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3~4년에 한 번씩 빙벽이 파열되는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가까이서 본 빙벽, 마치 안데스 산맥과 같은 '숭고'의 모습이다

그 옛날 마케도니아 출신 자연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빛의 본성이 백색이며, 어둠이 섞이면서 그 농담에 따라 빨강, 파랑, 노랑 등이 나타난다고 했다. 아니다. 빛의 굴절에 따라 빨강, 파랑, 초록의 삼원색이 등장하고, 이것들이 섞여 다양한 색깔을 창출한다. 그러나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은 모든 빛의 색상이 섞일 때 나타나는 일종의 현상이다. 색상이나 채도는 없고 명도의 차이만 지니기에 무채색이라기도 한다. 

괴테는 빛을 광학 이론으로만 접근해서는 안 되고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효과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빙하가 단순히 흰색으로만 이루어졌으면, 인간의 감동을 끌어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거기에는 우리 몸의 혈관과 같은 파랑이 핏대를 세우고 있어 원시 그대로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게다가 지천에서 발견되는 ‘불꽃(fire flower)’의 빨간 정염을 얼음 위에 드리우자, 비로소 모레노가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빙하'라는 말을 실감한다. 식물은 1억 6천만 년 전에야 꽃을 피웠다. 속씨식물의 등장이며, 곤충을 유혹하여 수분하는 공진화(共進化)의 시작이다. 찰스 다윈은 이를 일러 ‘지독한 신비’라 했다. 

그중 긴 파장을 가진 빨강이나 오렌지색 꽃은 동물에게 꿀 혹은 잘 익은 열매의 위치를 가장 강렬하게 전달한다. 그러니 빙하에 불꽃이 겹치면, 이를 일러 태초의 원시에 본능적 색채가 물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제 빙하를 밟지 못한 아쉬움에서 비롯되었을까? 눈으로 체험한 모레노 빙하의 아름다움을 격하게 표현했다. 이 정도면, 미니 트레킹한 일행들로부터 선망과 질시를 뽑아낼 수 있을까? ㅎㅎ 농담이다. 반면 빙하를 보는 내내 나만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던 감정은 진심이다. 그러나 아내를 비롯해 대한민국에 머무는 이웃들 모두 또 다른 즐거움으로 하루를 보내리라 믿는다. 자, 이제 내일 칠레로 떠날 채비를 서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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