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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30. 2021

카라바조와 몰타기사단

카라바조, <성서를 쓰는 성 제롬(1607)>

전통의 몰타기사단은 레판토 해전을 통해 이교도 세력을 저지했다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 마침 해전이 일어났던 그날 세례를 받았던 카라바조가 머리를 굴렸다. 이곳에서 공훈 기사 작위를 받게 되면, 불체포 특권과 함께 교황의 관용을 기대해볼 만했다. 영주이자 몰타기사단 단장인 프랑스 귀족 알로프 데 위그나코르에게 초상화를 그려줬다. 그리고 <성서를 쓰는 성 제롬>을 바쳤다. 

영주는 카라바조를 ‘카발리에르 디 그라치아(‘은총의 기사’)로 봉하며 몰타기사단의 망토를 하사했다. 요한 대성당에 걸린 <세례 요한의 참수>도 이때 영주에게 선물한 그림으로 추정한다. 작품은 대단한 명성을 누렸고, 이후 수년간 북유럽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몰타섬으로 여행했다.


<세례 요한의 참수(1608)>와 그림 세부

어둡고 음습한 감옥이다. 요한은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눕혀졌다. 목에 피가 흐르고 긴 칼이 곁에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망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사형집행인은 참수를 위해 비수를 꺼내 들었다. 살로메는 간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금쟁반을 들이민다. 하녀인 듯한 노파는 공포에 질려 있다. 두 명의 죄수가 창살 뒤에서 사형집행을 지켜보고 있는 감옥의 정황이 카라바조의 개인적인 경험을 반영한다. 로마에서 그는 그야말로 한량 집단에 속해 있었다. “희망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가 그들의 신조였다. 매춘부와 길거리 사기꾼과 친구로 지내면서 무수한 폭력 사건에 연루되어 일곱 차례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가로 3.7m, 세로 5.2m, 실물 크기의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제단화 중 가장 크고 유일하게 자신의 서명이 있다. 요한의 목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로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는데 복원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카라바조의 참회는 아직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성마른 성격을 제어하지 못하고 4개월 후 몰타기사단 기사 한 명과 난투극을 벌이고, 모욕했다. 영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라바조를 감옥에 가뒀다. 다시 몰타에서 탈주한 그는 피신차 들른 곳곳에서 유력자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면서 지냈다. 시라큐스에서는 <성녀 루치아의 매장>, 메시나에서는 <나자로의 부활>, 팔레르모에서는 <성 로렌스와 성 프란시스가 함께한 양치기들의 예배>가 그것이다.

이중, 삼중으로 쫓기는 카라바조는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 잠을 자야만 했다. 1609년 초가을, 다시 나폴리로 온다. 어떻게 하든 이곳에서 교황청의 용서를 구해 로마로 돌아가려고 결심했다. 10월 어느 날, 야외에서 그는 몰타기사단 추정되는 무장한 무리에게 둘러싸여 심하게 구타당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복수를 포기하고 그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이즈음 완성한 걸작이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두 번째 버전이다. (제목 그림은 첫 번째 버전(1605)>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10)> 두 번째 버전

이를 보면 카라바조의 당시 심경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살인죄를 물어 효수된 자신의 머리를 상상했을까? 골리앗의 잘린 머리에 자신의 얼굴 초상을 입혔다. 회한이 가득 찬 표정이다. 4년간 쫓기면서 육신과 정신이 모두 지쳤다. 이쯤 되면 그간의 난폭했던 삶을 돌이켜 보았을 것이고, 어찌 지난날에 후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손에 쥔 골리앗의 머리로 시선이 간 다윗의 표정이 승리에 취한 듯하지 않다. 슬픔과 연민을 품었다. 젊은 시절 카라바조의 모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중 초상화’ 설(說)이다. 그러니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즉 스스로 자신을 벌하는 표정이 밝을 수만은 없겠다. 

그림 세부

카라바조는 이렇게 진정으로 참회하는 심정을 오랜 후원자인 스키피오네 카파렐리 보르게세(Scipione Caffarelli Borghese) 추기경에게 전달하고 싶었으리라. 칼에 새긴 ‘겸손함이 자만심을 정복한다(약어 H-AS OS)’는 글귀가 명징한 메시지다. 보르게세는 베르니니를 열렬히 후원했던 인물로,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그는 교황 바오로 5세(재위 1605~1621)의 조카이자 고문관이기도 했다. 이런 힘을 갖추었기에 카라바조의 사면을 도왔고, 그가 죽고 난 후 도착한 그림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를 받게 되는 인물이다. 그의 별장이었던 ‘보르게세 미술관’에는 바로크 시대의 명작과 함께 그가 욕심내어 모았던 라파엘로, 티치아노를 포함한 많은 수집품이 전시되고 있다.

 

카라바조는 교황과 보르게세에 선물할 그림을 몇 점 들고 마지막 로마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한창 더위가 극성했던 여름으로, 이번엔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로마로 가는 육로를 피해 안전해 보이는 소형 펠루카(지중해에서 돛이나 노를 사용해 움직였던 배)를 선택했다. 험한 날씨 탓이었는지 짐을 실은 배가 스페인 점령 항구인 팔로(포르토 에르콜레라고도 한다)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카라바조는 짐을 뺏긴 채 투옥되었다. 다른 현상 수배자로 오인했다고 하는 설이 있는데, 여하튼 이 틈에 배는 먼저 떠나버렸다. 다음 정박지인 포르토 에르콜레에 도착한 배를 잡으려고 그는 해변을 달렸다고 한다.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심적으로 허망해진 카라바조는 열병(이 역시 추정으로, 당시 말라리아가 극성이었다)을 이기지 못했다.

1610년 7월 18일, 4년을 도망다니던 카라바조의 혼은 결국, 이승을 떠나 구천(九天)을 헤매게 된다. 그는 삶과 그림이 참으로 모순적인 화가였다. 그러나 인성이나 삶이 화가가 남긴 작품과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그 자체로 감상하고 평가해야 한다. 윌 곰퍼츠는 말했다. 그의 작품이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 이유는 ‘그의 나쁨 때문이 아니라 지극한 훌륭함 때문’이라고. 


몰타 기사단과 레판토 해전의 의미


<레판토 해전> 바티칸 프레스코화

에스파냐가 네덜란드 독립 전쟁 중 치른 레판토 해전을 당겨 설명하는 까닭은 순전히 카라바조 때문이다. 몰타 기사단은 제1차 십자군 원정 직후 1113년에 탄생한 요한 기사단을 모태로 창설했다.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아말피가 교황의 승인을 받아 창설한 기사단의 충성심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미 검증을 마쳤다. 순례자를 위한 예루살렘 최초의 유럽인 진료소로 시작하여 구호 기사단이라고도 불렀다. 성지 수호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나 8차 십자군 전쟁 이후 예루살렘에서 밀려나 1309년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섬을 정복했다. 로도스 기사단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슬람 배를 습격하면서 해군으로 변모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기독교 세계를 지켜온 해상 보루가 되었다. 

1522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 베오그라드를 차지한 후 배의 기수를 이탈리아반도로 향했다. 그러자 기사단이 술레이만 1세의 20만 명이 지나는 길목을 막아섰다.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는 병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웠다.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가 카를 5세, 프랑수아, 헨리 8세에게 분쟁을 멈추고 힘을 합쳐 로도스섬을 구원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유럽은 프랑스에 맞서서 신성로마제국과 잉글랜드가 이탈리아 북부에서 한창 전쟁 중이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전투(1453) 당시의 분열이 재연되었다. 결국, 기사단 홀로 6개월을 버티다 섬이 함락되었다. 다행인 점은 술탄 술레이만이 기사단 전원에게 재산을 챙겨 12일 내 섬을 떠나도록 배려했다. 멕시코를 병합한 신성로마제국(에스파냐) 카를 5세가 1530년 로도스 기사단에 근거지로 마련해 준 곳이 바로 몰타섬이었다. 북아프리카의 해적들로부터 에스파냐령 트리폴리를 방어케 할 목적이었다. 이곳에서도 오스만과 한차례 공방이 오갔다. 오늘날 튀니지의 영토에 해당하는 제르바섬에서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동맹군을 격파한 술레이만이 1565년 다시 몰타섬을 공략했다. 이번에도 절대 열세였다. 그러나 3개월간 공격을 막아냈고, 그해 9월 시칠리아로부터 에스파냐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오스만 튀르크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베로네세, <레판토 해전(1572)>

1570년 7월에는 술레이만 1세의 뒤를 이은 셀림 2세가 베네치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베네치아는 유럽과 오스만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지키면서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파마구스타를 제외한 키프로스 전역을 점령했다. 급기야 베네치아는 교황 피우스 5세에게 의지하여 교황령 국가, 토스카나 대공국, 사보이아 공국, 그리고 에스파냐(펠리페 2세, 재위 1556∼1598)와 동맹을 결성했다.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앞바다에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고대 이후 서양 역사에서 가장 큰 해군 전투였다. 신성동맹군은 카를 5세의 사생아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총사령관으로, 206척의 갤리선과 6척의 갤리어스 전함을 지휘했다. 몰타 기사단도 작은 힘이나마 전력에 보탰다. 오스만 튀르크 해군은 알리 파샤가 지휘했다. 222척의 전투용 갤리선과 56척의 소형 갤리선 등에 숙련된 선원들이 승선했다. 그러나 정예 예니체리 군의 전투력이 예전만 못했다. 결정적으로 화력에서 차이가 컸다. 1,815문의 함포와 개량형 화승총·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동맹군에 비해 오스만군은 750문이었으며 그것도 탄약이 불충분했다. 병사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복합궁을 사용했다. (위키백과)

약 5시간에 걸쳐 진행된 전투에서 기독교 동맹군은 이슬람군을 물리쳤다. 오스만 해군은 두 번 다시 바다를 통해 유럽을 도모하려 들지 못했다. 유럽에는 군사적 승리, 그 이상이었다. 그간 오스만 제국은 막강했으며, 유럽의 아이들이 울음을 멈출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레판토 해전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이 노출되었고, 기독교 유럽은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동맹에서 탈퇴하면서 1573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베네치아가 키프로스를 양도하고 배상금까지 지불했으며, 유럽의 교역 중심지는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오스만 제국은 1683년 프로테스탄트로 구성된 헝가리 귀족들의 요청을 받고 나서야 육로로 방향을 바꿔 유럽 대륙을 침공한다. 제1차 빈(비엔나) 전투이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군대와 폴란드 왕 얀 소비에스키가 원군을 보냈다. 싸움은 격렬했으며, 오스만 20만 병력은 황급히 후퇴했다. 이때 제국군이 챙기지 못하고 남겨놓은 것이 비엔나커피가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빈 황실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 세워졌다. 1698년 제국의 군대는 다시 한번 대륙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압도적인 무기체계와 전략 차이로 패퇴했다. 서양이 무력에서 드디어 동방을 압도하기 시작하는 변곡점으로 작용하는 제2차 빈 전투이다. 

이 사이 표트르 대제가 1689년 새로운 군주로 등극하여 러시아를 개혁했다. 그는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도제로 일하면서 선박 제조 기술을 배웠고, 항구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제국을 병자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 열강으로부터 계속 침식당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면서 터키 공화국으로 간신히 명맥을 잇는 신세로 전락했다. 자고로 전쟁은 최후의 외교 수단이며, 하지하(下之下)의 책략이라는 사실을 명심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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