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차별이 하나 있다. 바로 성차별이다. 노예제도보다 역사가 길고 끈질기다.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4년이 되어서야 여성들의 투표가 가능해졌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간 대개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에 불과했다. 많은 법체계에서도 강간을 재산권 침해로 여겼다. 성폭행 자체도 그렇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더 큰 문제였다. 여성은 피해자가 임에도 불구하고 예나 지금이나 살아가기가 녹록치 않다.
17세기 초 이런 고초를 겪은 대표적인 여성화가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활동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이다. 카라바조에게서 어두운 색조와 극적인 빛의 효과에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했다. 당시로선 여성이 독자적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그러나 그녀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눈치챈 아버지 오라치오가 당시 로마에서 꽤 이름난 화가였다. 카라바조와 친구였던 그는 미술학교 입학이 거절당한 딸을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가르치면서 작업을 함께 했다. 당시 여성의 미술 교육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이 화가의 집안이었으니 아버지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을까?
16세기가 저물어가는 1599년 9월 11일, 로마의 산탄첼로 다리 광장에서는 세기의 처형식이 있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베아트리체 첸치와 그녀를 동정하여 가담한 계모와 친오빠, 이복 남동생이 처형됐다. 친부 프란체스코는 아내와 자식을 학대했고, 그것도 모자라 친딸 베아트리체를 강간했다. 그날 처형장에는 현장을 직접 보려고 유명한 화가들이 모여들었다. 오라치오도 참석했다. 화가로 키우고자 하는 6살 딸을 데리고. 그날, 아르테미시아를 목말 태워주던 날, 멀리 제노바에서 온 젊은 화가 한 명을 만났다. 그가 바로 아고스티노 타시(Agostino Tassi, 1578~1644년)였다.
그들의 악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아버지의 기대대로 10대에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열두 살에 어머니를 여읜 후 동생들을 돌보기까지 했으니 오라치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딸이었으리라. 1611년 그녀가 18살 되던 해 타시가 다시 로마에 왔다. 그는 팔라초 델 퀴리날레 궁전 프레스코 작업을 하면서 작업책임자인 오라치오와 가까워졌다. 오라치오는 타시에게 딸 아르테미시아의 소묘 수업을 맡겼다. 참고로 그에게 미술 수업을 받은 유명한 화가로는 열세 살 때 이탈리아로 건너온 프랑스의 풍경화 거장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이 포함되어 있다.
타시는 본래 유부남으로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제와 간통하고, 창녀를 구타해서 구속되기도 했다. 그해 5월 그는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고, 결혼을 약속했다. 오라치오는 머리끝까지 치미는 화를 누르고 딸의 결혼 혹은 어떤 타협점을 찾아보지만, 여의치 않자 사건 발생 1년 후 고소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은 딸의 정조도 아버지의 재산으로 간주하던 시대였다. 죄목은 ‘처녀성 강탈’. 최초, 최대의 성폭행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법정 공방은 7개월을 끌었다. 그러나 타시는 1년 형을 선고받았고, 실제 감옥 생활은 반년에 그쳤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는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녀는 피해자 신분이었음에도 ‘손톱 뒤틀기(시빌레 sibyl, 혹은 sibylla)’ 고문을 당하고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다. 시빌레는 실토를 안 하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악독한 고문으로, 항상 옳은 말만 했던 고대의 여신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따라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진술을 번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실로 인정됐다. 또한 두 차례의 치욕적인 처녀막 검사. 강간 자체보다는 처녀성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재판이 끝나고도 사람들은 등 뒤에서 계속 수군거렸다. 수녀원에서조차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성 피해자로서 여성이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 각박했다. 결국, 그녀는 400에퀴의 지참금을 주고 피렌체의 삼류 화가 피에란토리오 스티아테시(Pierantonio Stiattesi)와 서둘러 결혼을 했다. 그래야 타시와 아버지, 로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편과 함께라야 그림을 계속 그릴 수가 있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존재 이유이며, 감정의 통로이자 치유였다.
1615년 로마를 떠나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도 피렌체에 정착했다. 당시 피렌체는 여전히 메디치가(家)의 군주들이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남편은 낭비가 심했으며, 무능했고, 무책임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은 행방불명이 되었고, 두 딸을 혼자서 양육해야 하는 그녀의 삶은 여전히 피곤했다. 이때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인물이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이다. 아버지 오라치오에게 같은 주제의 작품을 의뢰했던 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를 보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아버지의 솜씨보다 낫지 않소.”
거침없는 붓놀림,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조, 극적인 상황 표현,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한 무엇이 내재하였다. 그녀는 홀로페르네스에게 자신을 성폭행한 타시를 투사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머리칼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도, 표정도 단호하기만 하다. 당시에는 많은 화가가 유디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그림으로 그렸다. 유디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 여성으로 티란의 베툴리아 지방 출신이다. 그녀는 당시 적장인 아시리아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술을 먹인 후 그의 목을 쳐 도시를 구해낸 여인이었다. 마치 조선의 논개와 같다.
카라바조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그렸다. 그러나 강렬함에 있어서 그녀의 유디트가 그 이상이다. 훨씬 더 근육질이며, 역동적이고 강인하다. 전사답다. 틀림없이 타시에게서 받은 오명과 치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에르테미시아와 타시가 서로 사랑을 했고, 아버지 오라치오가 이들을 질투해서 소송이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 속 그녀의 표정엔 한 치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한때 사랑했던 인물에 대한 단죄였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떨림이 있었으리라. 이후 그녀는 인기가 있었던 이 주제의 작품을 57개나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후속작 형식의 <유디트와 그 하녀(1613~1614)> 역시 그 어떤 두려움이나 죄의식이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바구니에 유디트의 목을 담은 하녀조차 담대하다.
굳이 페미니스트인 척하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을 대하면 저절로 한 생각이 든다. “참! 예전에는 여자로, 더군다나 화가로 살아가기란 정말 힘들었겠구나”라는 공감이다. 이번엔 아르테미시아의 가장 오래된 작품 <수산나와 두 노인>이다. 성경 <다니엘서> 이야기를 담았다.
어느 날 남편 요아킴이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다. 그중 늙은 재판관 두 명이 수산나의 미모를 보고 흑심을 품었다. 손님들 대부분이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고 있는데 이들이 수산나에게 몸을 요구했다. 거절하면 “젊은 남자와 간통을 했다”고 남편에게 거짓으로 알리겠다는 협박과 함께. 그러나 수산나는 “겁탈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저항했다. 결국, 수산나가 법정에 섰는데, 성령이 어린 다니엘을 통해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고 사형을 면했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두 노인네라고 했는데, 그중 검은 머리칼의 사내가 젊다. 훗날 자신을 성폭행하는 타시를 대입했다고 하는데, 그녀로서는 그에게서 어떤 조짐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왼편 수산나의 발 그림자 지점에 그녀의 서명과 제작 일자를 최초로 명기했다. ‘여성 화가의 누드 작품’이라는 점이 도드라진다. 당시 여성 화가는 인체 드로잉조차 배제되었으며, 아무리 아버지가 화가라 해도 누드모델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녀의 누드는 남성 위주의 관능성이 배제된 채 메시지에 충실한 경향이 뚜렷하다. 작품 속 수산나가 노인네들의 얼굴을 외면한 채 짓고 있는 역겨운 표정이 매우 현실적이다.
틴토레토, 루벤스, 렘브란트 등의 거장들도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 속 수산나는 장로들이 자신의 몸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혹은 인식했더라도 수산나의 누드에 보는 이의 시선이 모이도록 그렸다. 여성을 수동적이고, 성적 대상으로 여긴 남성의 시각이다. 틴토레토의 내면에는 곤경에 빠진 수산나의 입장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다. 루벤스는 그나마 조금 발전했지만. 여성이 처한 통상적인 처지를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다만 이 작품을 지나치게 ‘여성 화가’라는 관점에서만 대할 필요는 없다. 자칫 그녀의 여러 재능을 놓칠 수 있다. 그녀 나이 17살 때 그렸다. 이후 그녀는 구성뿐 아니라 건물 깊이에서 색상을 다루는 기술, 인체에 대한 사실적 표현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그녀는 명성을 얻고 나서도 부녀간 표절, 후원자들과의 성추문, 사생아 출산 등 삶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을 놓지 않았고, 당시 여성 화가가 넘기 힘든 벽으로 인식되던 종교화와 역사화를 그렸다. 스물여덟 살에 이탈리아 화가협회 디세노 한림원에 가입했다. 마흔여섯이 되어 25년간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극적으로 화해했으며, 당당하게 로마로 돌아가 로미(Lomi)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베네치아를 거쳐 1630년부터 나폴리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1656년경 나폴리에서 사망했으리라는 추정이다. 에르테미시아는 남성의 폭력, 사회제도에 대한 불공정에 맞선 여성 작가로 뒤늦게 미술사적인 평가를 받았다. 197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여성 미술가들 1550~1950>이라는 특별전시회가 있었다. 그리고 <불멸의 화가 에르테미시아>를 쓴 소설가 알렉산드라 라피에르에 의해 그녀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