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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09. 2021

네덜란드가 동참한 30년 전쟁

벨라스케스, <브레다 성의 함락>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당시 삽화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재개 3년 전 '30년 전쟁(1618~1648)'에 뛰어들었다. 전쟁은 ‘(제2차) 프라하 창문 밖 투척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카를 5세 이후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가 분리된 가운데 합스부르크가(家)의 영향력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일부 지역에만 미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신교의 자유를 보장했던 칙령을 취소했다. 보헤미아 의회는 이에 맞서 그를 폐위하고,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내세웠다. 협상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불만을 품고 황제의 대표단 3명을 창문 밖 20m 아래로 던져버렸다. 다행히 이들은 거름 구덩이에 빠져 목숨을 건졌으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쟁이 촉발했다.

 

참혹했던 전쟁의 전반은 종교 간 갈등으로 비쳤다. 가톨릭을 수호하고자 하는 신성로마제국이 신교의 네덜란드를 비롯한 스웨덴, 덴마크, 보헤미아 등과 싸웠다. 그러나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각국의 이해에 따라 결성된 동맹국간 국제전 형식으로 변모했다. 이즈음 네덜란드의 국력은 이전과 달리 강성해졌다. 전쟁 기간 중 사실상 독립국으로서 기능하였으며, 북해의 파도와 싸웠던 경험을 살려 강건한 해양 국가로 성장했다. 잉글랜드가 포(砲) 제작에 몰두할 때 가성비가 뛰어난 중형 선박 ‘퓰류트선’을 제작했다. 약 20명의 선원이 많은 양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도록 둥근 형태를 갖추었다. 임금 비용을 절감했고, 건조비까지 쌌다. 화물운송비가 경쟁국들의 1/3에 불과했다. 덧붙여유대인들의 자본을 바탕으로 조선업과 해운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약해진 틈을 타 바다로 진출했다. 인도양과 동인도제도를 지배했다. 영국의 양모 등을 타지로 공급하고 동방에서는 후추, 설탕, 차 등을 독점적으로 실어 날랐다. 영국 제품을 대륙 각지로 ‘연결해 판다’는 뜻으로, 유럽에 없었던 최초의 비즈니스 모델인 ‘중계 무역’을 창출했다. (우야마 다쿠에이, <너무 재밌어서 잠 못 드는 세계사>) 브뤼주, 겐트 그리고 안트베르펜 등 부유한 도시들이 세워졌다. 그중 안트베르펜의 상인 계급은 시 정부를 장악할 정도로 강력했다. 1609년부터 1651년까지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전쟁의 참혹한 비극 현장(1632) 

중계무역은 안정적인 상거래 자금의 확보와 공급이 생명이기에 금융업이 발달했다. 자국 기업간 경쟁이 심해지자 1602년 델프트에 본부를 둔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 회사를 수립했다. 81명의 선주들이 황금 64톤의 막대한 자본을 공동 출자했다. 선주 절반 이상이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들은 10년을 목표로 했던 운영 기간이 계속 연장됨에 따라 투자증권의 거래를 가능하도록 했다. 위험을 분산한 채 시세 차익을 노리는 주식회사다. (이주희, <강자의 조건>) 포루투갈인을 내쫓고 인도네시아와 스리랑카를 식민지화했고 대만, 중국, 그리고 에도 시대의 일본에 진출했다. 1621년에는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교역을 목적으로 서인도 회사를 발족했다. 이미 카리브해 세인트마틴섬에 정착지를 만든 데 이어, 1625년에는 오늘날의 맨해튼에 뉴 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1630년 독립전쟁 막바지에는 브라질 북부 페르남부코와 레시페를 점령하여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건설했다. 아프리카로 해안 거점을 넓혔다. 세계의 자금이 암스테르담으로 흘러들었다. 안트베르펜에서 취급하던 설탕과 다이아몬드까지 집중되면서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튤립 파동이 진정된 후 놀랍도록 짧은 시간에 네덜란드는 잉글랜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엄두를 내지 못할 자금원을 안전하고 탄력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1648년 승전국이 된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위스와 더불어 독립과 함께 종교의 자유를 쟁취했다. 이후 외부의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해상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1652년 동인도 회사가 희망봉에 재보급 기지를 설치하면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네덜란드인을 훗날 보어인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가장 활발한 교역 활동을 한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였다. (마이클 하워드, <유럽사 속의 전쟁>) 


벨라스케스, <브레다 성의 함락(1634~35)>

펠리페 4세는 문화적으로 에스파냐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만들어 준 군주이다. 그러나 불필요하게 네덜란드와 전쟁을 재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가를 침몰시켰다.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 고민스러운 과제를 부여받은 화가가 바로 벨라스케스로, 역사화의 걸작 <브레다 성의 함락>에서 그 흔적이 드러난다. 실제 전투는 1625년에 벌어졌다. 그러나 1630년부터 1635년까지 마드리드 동쪽에 새로 짓는 궁전(여름 별장) ‘부엔 레티로’의 전쟁박물관을 장식하기 위한 작품이다. 당연히 작품의 주인공은 당시 전투를 이끌었던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장군이다. 그러나 자국의 힘을 과시하고 펠리페의 업적을 담으려 했기에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붓을 잡았다.

휴전하고 12년이 지난 1621년 펠리페가 16살에 즉위하면서 전쟁을 재개했다. 그리고 1625년 6월 5일 네덜란드의 남부 전략 요충지 브레다를 함락했다. 그러나 그곳 시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봉쇄된 도시에서 12개월을 버텼다. 그 사이 전염병이 돌면서 에스파냐군도 손실이 컸다. 한 마디로 소모적인 전쟁이었다. 이 실속 없는 전투를 표현하면서 벨라스케스는 신중했다. 애써 영웅적인 무용담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작품 속 전장에는 아직 화염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의 참혹함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승패를 떠나 양편 군대는 서로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취했다. 브레다의 네덜란드 총독이었던 나사우 가문의 유스틴은 왼발을 살짝 구부려 예를 취하며 성의 열쇠를 승자에게 건넨다. 패장이지만, 그 태도가 비굴하지 않다. 승자인 스피놀라 장군 역시 타고 있던 붉은 말에서 내려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 패장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간 보여주었던 감투 정신과 피곤함을 위로한다. 

왼편으로 피 묻은 흰옷을 입은 젊은 병사의 고개를 숙이고 슬픔을 삼킨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한눈에 구별되지 않는다. 작가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들이 든 긴 창들의 질서정연함의 차이에서 겨우 가늠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른편 에스파냐군의 빼곡한 창은 하늘을 찌를 듯 위엄을 갖추고 흐트러짐이 없다. 완성 직전에 추가한 그 인상적인 모습에서 작품의 부제가 ‘창검 혹은 창(Las Lanzas)’이라는 점을 납득한다.


벨라스케스는 구성, 색채와 빛의 세밀한 사용을 통해 현장감을 강조했다. 그는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스피놀라 장군과 동반했기에 누구보다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총명하고 관대한 그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의 결말은 이렇게 영화처럼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참혹, 그 자체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국제 사회에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던 시기였다. 벨라스케스는 스피놀라가 유스틴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파트릭 데 링크, <세계 명화 속 숨은 그림 읽기>) 그러나 그에겐 용감하고 고귀하며 승자로써 관용을 베푸는 에스파냐의 자화상이 필요했다.

1648년, 브레다는 다시 네덜란드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에스파냐는 전쟁의 명분이었던 네덜란드의 독립과 종교의 자유를 승인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네덜란드 진영의 병사 중 한 명이 관람객을 향해 빤히 쳐다보는 모습에서 이 결과를 예상해 봄직했다.


한편 전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또 다른 제국 신성로마는 빈으로 진격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1699년 헝가리를 빼앗았다. 그러나 마지막 힘을 다 쓰고 난 뒤 에스파냐와 함께 점점 역사의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반면 전쟁을 통해 가장 실속을 챙긴 국가가 바로 프랑스다. 알자스 지방을 비롯한 남부 네덜란드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 영토로 병합했다. 프랑스는 전쟁 기간 중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루이 13세의 재상 겸 추기경인 리슐리외 (1585~1642)가 자국 내 신교를 무자비하게 짓밟았지만, 독일 지역의 신교 제후에게는 가톨릭에 반대하는 싸움을 부추겼다. 그에게 적은 ‘국가의 적’ 외에는 어떠한 적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 지역의 분리가 프랑스의 안녕과 직결된다고 판단했다. 이 정책은 독일의 내분을 촉발했다. 전후 자주적인 군비와 외교정책을 보유한 350개의 독립연방국으로 쪼개졌다. 제국 의회는 존재하였으나 만장일치제를 채택했기에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식물 의회나 마찬가지였다. 리슐리외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 분리정책은 후임 재상인 마자랭이 계승했다. 결과적으로 전쟁의 중심 무대였던 이곳 독일 지역의 전후 생활상은 참담했다. 전 지역이 폐허가 되었으며 인구 1/3 이상이 죽었다. 유럽의 3등 국가로 전락한 채 1871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통일을 이룰 때까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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