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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15. 2021

프란스 할스의 웃음과 해학

역사는 네덜란드를 통해 국가란 규모에 앞서 개방성과 관용성이 국력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독립전쟁 이후 소금에 쩔은 네덜란드 공화국은 무역으로 인해 시민계급이 성장했다. 현대 해양법, 상법, 국제법의 기초가 이때 닦였다. 종교적 관용은 유럽과 멀리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온 유대인을 흡수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 산업을 견인했고, 무역과 선진 금융 체계를 확립했다. 17세기에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고, 서유럽 국가 중 가장 강력하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50%에 달하는 주민들이 이미 도시에 살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전 유럽에서도 단연 최고였다. (토마스 R. 호프만, <바로크>) 

사상의 관용으로 발전했다. 인본주의의 선구자로 <우신예찬>을 쓴 에라스무스와 프랑스 위그노였던 데카르트, 그리고 유대인 바뤼흐 스피노자와 같은 사상가가 등장했다. 유럽 인쇄의 중심지가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여 학문과 문화가 병진했다. 


미술에서 특징적 변화는 교회와 귀족이 아닌 새로운 구매층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부를 축적한 시민계급은 구매력을 갖추고 저택 벽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르의 그림을 선택했다. 그간 대접받지 못했던 장르화(민속화), 정물화, 초상화가 그것이다. 그중 북부 회화가 신교 사회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초상화 덕분이다. 당시 성공한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모습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어 했다. 오늘날 기념사진을 찾는 동기와 비슷하다. 공공장소에는 집단 초상화를, 가정에는 개인과 가족 초상화를 사진처럼 보관했다. 

같은 맥락에서 부를 과시하기 위해 귀한 소장품이나 이국의 열대 과일 등을 포함한 정물화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문자를 미리 확보하기 힘들었던 화가들은 바다 풍경화, 전쟁화 등을 미리 그려 놓고 구매자를 구하는 판매 형태가 등장했다. 풍경화가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1596~1656)이 대표적이며, 더불어 화상(畵商)의 역할이 활성화되었다. 


<웃고 있는 기사(1624)>

이 작품은 1888년에 와서야 <웃고 있는 기사(1624)>로 불렸다. 콧수염 때문이다. 하지만 초상화에서 웃음을 다루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1~1666)가 의도적으로 기사의 밝은 기분을 담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화려한 문양과 상징을 담은 왼팔의 팔꿈치가 감상자 쪽으로 튀어나와 그 단축법 처리에 있어 탁월한 솜씨가 발견된다. <모나리자>가 여성 초상화로 유명하다면, 이 작품은 남성 초상화 중 가장 정감이 있고 유머가 넘치는 그림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상권을 제패한 대국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삶은 척박했다. 에스파냐와 독립 전쟁을 치러 경제적으로 피곤한 차제, 신앙에서 엄격하고 검소한 칼뱅주의자이기를 강요받았다. 웃는 모습은 자칫 바보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무자비하고 잔인할 정도의 사실주의 화가라는 평을 받았던 그는 생활이 팍팍해진 네덜란드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그는 ‘웃음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앤트베르펜에서 태어난 할스는 에스파냐의 지배를 피해 1590년경 하를렘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666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초상화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하를렘은 홀란트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북부의 피렌체’라고 불렸다. 맥주 양조업과 직조업이 발달했으며,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초상화가 환영받았다. 할스가 술을 마시며 파티를 여는 사람들을 자주 그린 까닭이기도 하다.

<말레 바베(1633~1635?)>

그의 초상화 중에는 <말레 바베(Malle Babbe)>가 매우 인상적이다. ‘말레’가 ‘미친’이란 뜻도 있듯이 어쨌든 웃고 있는 바베라는 여인을 그렸다. 술에 취해 기분 좋은 모습이다. 어깨 위에 올빼미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당시 그곳에선 ‘올빼미처럼 술 취한’이란 잠언이 있었으니 작가의 도덕적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선입견을 배제한다면, 그림은 소박하면서도 낙천적으로 다가온다. 바베는 결국, 1653년 하를렘의 빈민 구호시설에서 발견되어 시립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 

웃고 있는 찰나를 캔버스에 잡아 두기 위해 할스는 밑그림을 생략하고 물감을 직접 캔버스에 칠하는 방식을 택했다. 게다가 빠르고 거칠게 붓질했다. 이전에는 없던 기법이다. 그러나 붓질이 캔버스에 드러남으로써 당시에는 완벽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붓뿐 아니라 나이프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즉흥적이고 과감하게 터치(알 라 프리마 기법, 이탈리아어로 단숨에 그린다는 뜻)를 했다.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현대적인’ 기법이다. 특히 <집시 여인>은 마네를 매혹했다. 이로 인해 할스는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바로크 화가라는 명성을 얻는다. 

<집시 여인(1628~1630)>

개인적으로는 플랑드르 미술에 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와중에서 네덜란드 미술과 그곳 화가들을 편들고 싶다. 하지만 할스는 불운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당시 화단의 중심에는 같은 세대의 화가 루벤스와 한 세대 뒤 렘브란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한 가정사로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1650년 이후로는 거의 주문을 받지 못했다. 초상화를 그려주고 빵 한 조각을 바꿔 먹을 정도였다. 그의 작품에서도 유쾌함이 사라졌다. 1662년부터 당국으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말년에는 자선단체에 의존해서 생활하다 양로원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가난은 시대를 앞서간 화가들의 숙명인가 보다. 그래도 ‘반창고’ 같은 유머를 잃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캐나다 코미디언 짐 캘리는 말한다.


“유머는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잘 견딜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지요.” 


막 부부가 된 이들이 야외에 앉아 결혼을 자축한다. 주인공이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며 <신혼부부의 초상>으로도 불리는 작품 <이삭 마사 부부의 초상>이다. 굳이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내놔도 자연스러운 작품으로 보인다. 17세기에 초상화는 곧 오늘날의 인물 사진이다. 당시 부부의 그림은 통상 따로따로 그려져 벽 왼편에 남편, 오른편에 아내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어 놓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할스는 부부를 함께, 그것도 야외에서 스냅사진처럼 그렸다. 무척 이례적이다. 더욱 감탄을 자아내는 점은 역시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상상컨대, 할스가 자연스러운 자세와 함께 두 사람을 향해 ‘치즈~’라고 하며 웃음을 주문했을 법하다. 보는 이의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진다. 요즘에도 사진기 앞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웃음 짓기가 어렵다. 이 점에서 할스가 순간적인 이미지를 얼마나 빨리 낚아챘는지 알 수 있다. 할스의 초상화 대개가 이렇다. 그 자신이 낙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삭 마사 부부의 초상(1622)>

할스와 꽤 친했던 부유한 상인 이삭 마사(Isaac Massa)의 오른손이 가슴에 있다. 결혼의 정절을 상징한다. 엉컹귀, 포도넝쿨, 공작새, 분수, 다이아몬드반지 역시 사랑과 정절, 그리고 결혼과 관련 있다. 그리고 넓은 챙이 있는 펠트 모자, 레이스 칼라가 달린 검은 실크 의상, 고급 리넨 팔찌를 착용했다. 오른손을 신랑 어깨에 올려놓은 신부(Beatrix van der Laen)는 시장의 노처녀 딸 베아트릭스 반 데어 라엔이다. 자주색 가운과 분홍색 리본이 달린 흰색 모자, 그리고 레이스 트리밍 된 손목 밴드를 차고, “씩~” 웃는 모습에서 당시 신생 네덜란드 공화국 여성의 자신감과 지위를 읽을 수 있다. 한 번도 이탈리아에 가보지 않은 할스가 배경에 이탈리아 빌라와 그 앞 대리석 조각상을 그렸다. 그의 취향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루벤스의 <인동 나무 그늘 아래 화가와 그의 아내(1609)>를 닮았다. 


사후 그의 이름은 대중으로부터 곧 잊혔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 언론인이자 비평가인 테오위르 토레 덕분에 다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토레의 이름은 다음 베르메르에게서도 들을 수 있으니 이쯤 해서 이야기를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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