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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16. 2021

렘브란트의 출세, 시련, 그리고 도전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은 ‘빛의 마술사’라 불린다. 카라바조와 루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외국에 나가본 일이 없었기에 빛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매우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그의 최고 출세작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는 암흑과 같은 공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선명하게 부각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어둠을 단순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담(濃淡)을 배분하여 게시물과 기둥을 희미하게 표현했다. 공간감이 깊어졌다. 

미레벨트의 <빌럼 판 데르 메이르의 해부학 강의(1617)>

17세기 가장 바쁜 초상화가였던 미힐 얀손 판 미레벨트(Michiel Jansz. van Mierevelt, 1566~1641)의 <빌럼 판 데르 메이르의 해부학 강의>와 비교해 볼 때 인물들의 개성이 나타나는 표정과 동작이 생생하다. 오른쪽 귀퉁이에 커다란 책은 유명한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교본>이다. 작품은 외과 의사 튈프 교수의 강의 1주년 기념으로 제작되었다. 26세에 불과했던 렘브란트를 단번에 유명하게 해주었다. 튈프를 다른 의사들과 뚜렷이 떼어놓았으나 주문한 암스테르담 길드 회원 일곱 명 모두 만족스러워했다. 

당시 유럽에는 해부학이 교양이었으며, 따라서 왕과 귀족, 지식인들 사이에는 인체 해부에 관심이 깊었다. 렘브란트는 일렬로 인물이 쭉 늘어선 낡고 딱딱한 기존의 초상화 형태를 벗어나 생생한 드라마를 연출했다. 튈프 교수가 핀셋으로 무장강도 아리스 킨트의 시신 중 엄지와 검지를 연결해주는 힘줄을 잡고 있다. 다른 손가락과 마주 보는 엄지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임을 강조한 표현이다. 하지만 실제 해부학의 순서 -복강(腹腔)을 먼저 절개하고 창자를 드러낸 다음에야 팔다리와 뇌를 절개- 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튈프 박사의 특별한 요청으로 이루어진 일로 추정된다. 단체 인물화가 유행한 당시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에게 주문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후 그의 삶은 예상과 달리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왔다. 자신의 그림처럼 삶도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작품과 17세기 네덜란드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반닝 코크의 민병대/혹은 야간순찰(1642)>

에스파냐와 30년 전쟁 중 공화국 체제의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조직이 바로 시민 자위대이다. 그러나 전후에는 상류층 남성들의 사교 클럽이 되어 있었다. 암스테르담에는 1620년부터 1650년 사이 200여 명의 대원을 보유한 20여 개의 부대가 있었다. 렘브란트의 대표작 <반닝 코크의 민병대>의 모티브가 된 화승총 연대(클로베니르스, kloverniers)도 그중 하나다. 빛과 어둠, 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통해 생동감 있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하지만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작품이다. 

실내에 한 무리의 인원들이 가득 서있다. 화승총 소지를 허락받은 이들은 새로운 회합장소인 클로베니르스둘렌 회관을 장식할 그림을 위해 모였다. 코크 대위의 검은색 옷은 신교도를, 부관 빌렘 반 루이텐부르크의 화려하고 밝은색 옷은 가톨릭교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조국을 수호하려는 애국심으로 신구교간 갈등을 극복한 모습이다. 그러나 28명의 성인과 3명의 아이가 함께 하여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부분 부유한 직물상인인 이들은 이후 에스파냐와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 직접 참전할 기회가 없었기에 과시적인 그림이 되었다. 그런데도 렘브란트는 황금기를 맞은 17세기 네덜란드가 시민에 의한 통치, 즉 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그림으로 지위를 격상시켰다. 

왼편 빛을 받은 소녀가 가장 논란이 컸다. 당시 계약 문서가 남아 있어 나머지 열여섯 명의 대원들 이름은 확인했으나 소녀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초상화에서 보기 어려운 가상 인물이다. 일부에서는 렘브란트의 죽은 아내 사스키아를 닮았다고도 분석하기도 한다. 소녀의 옷차림에 허리춤에 거꾸로 묶인 닭(맹금류)의 큰 발톱이 민병대를 상징한다. ‘클로베니르스(Kloveniers)’가 조류 발톱을 뜻하는 ‘clauweniers’와 발음이 비슷하며, 대장의 성(姓) '코크'의 비유로도 본다. 그러나 화승총을 든 인물 사이에서 반대 방향으로 향한 여자아이의 모습은 3세기 동안 예술사가를 의아하게 했다. 

프란스 할스의 <마헤레 단체로 알려진 레이니에르 레알과 코르넬리스 미키엘츠 블라외브가 통솔하는 사수단체(1633~1637)>

이보다 5년 전에 완성한 프란스 할스의 <마헤레 단체로 알려진 레이니에르 레알과 코르넬리스 미키엘츠 블라외브가 통솔하는 사수단체>와 비교해 보면, 무엇이 문제였는지 대번 확인할 수 있다. 할스의 그림 역시 그간 뻣뻣했던 인물들에게서 활기가 넘쳐난다. 할스는 단체 초상화지만, 동시에 개개인의 독립적인 초상화 역할도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어느 편지에선가 작품의 제작 동기를 이렇게 고백했다.


"주문받은 개개인의 초상보다는 창조력이 요구하는 바에 굴복해 버렸다."


인물 전체의 산술적 배분보다 상징성과 인물 전체의 역동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뜻이다. 반닝 코크가 부관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며 발을 떼자, 부대원들이 행진을 서두른다. 붉은 옷을 입은 부대원은 총알을 장전하고, 부관 옆 헬멧을 쓴 사람은 입으로 약실을 분다. 즉 등장인물의 비중이 동일하지 않았다는 것은 초상화 성격보다는 행진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렘브란트는 작품의 구성을 사전 상의했다. 따라서 부대원들도 자기 위치를 알았고, 1인당 100길더 안팎으로 모두 1,600길더를 나누어 냈다. 처음에는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출발했다. 물론 어둡고 밝게 처리한 렘브란트의 그림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오른편 한 명의 경우, 쭉 뻗은 앞사람의 팔에 얼굴을 가렸다. 당사자로선 심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결국, 암스테르담에서 권력이 컸던 쥔 안드리스 드 흐래프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분쟁이 발생했고, 악의에 찬 비난이 재생산되었다.

클로베니르스둘렌에 걸린 작품은 1715년경 암스테르담 시청의 작은 전쟁회의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두 출입문 사이에 걸기엔 너무 컸다(4.5m×5m). 작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왼편의 높이 28cm, 넓이 64cm가 잘려 나갔다. 왼편 작은 키의 인원 앞 공간이 꽉 막힌 느낌이 드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분쟁과 관련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온 소문일 뿐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특히 이 작품으로 인해 렘브란트가 후원자가 끊겨 곤경에 빠졌다는 비난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마리에트 베스테르만, <렘브란트>) 한편 지저분한 광택제와 ‘이탄 난로’의 심한 그을음으로 인해 그림이 점점 검게 변하더니 한 세기가 지나자 작품 해석까지 바뀌었다. 야음을 틈타 기습을 나가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배경이 한낮인데도 <야경>, 또는 <야간 순찰>이라고도 불린다. 가장 위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삶만큼이나 곡절이 많았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매음굴의 탕자(1635)>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공업 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났다. 독립전쟁 당시 가장 충성심을 보였던 바로 그곳이다. 렘브란트는 제분업자였던 아버지 덕에 집안이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레이덴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몇 달 만에 그만두었다.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미술 수업에 본격적으로 집중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재성을 보였다. 레이덴에서 이미 이름을 떨쳤던 렘브란트는 1631년경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도 곧 실력을 인정받은데 이어 1634년 화상 헨드리크 윌렌부르흐의 조카이자 레바르덴 시장의 딸인 28세의 사스키아와 결혼함으로써 신분 상승을 했다.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매음굴의 탕자>가 그때의 작품으로, 무릎에 사스키아를 앉히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높이 들고 웃는 모습이 그의 화려했던 시절을 상기시킨다. 

더구나 렘브란트는 당시 네덜란드의 시대적 배경에 힘입어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왕과 귀족, 교회를 대신해서 재력을 갖춘 신흥 부르주아가 새로운 수요층을 형성했다. 새로운 미술 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날개를 단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유명 그림과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골동품을 사 모았다. 특히 판화를 집중적으로 샀는데, 색깔 없는 작품에서 구도와 음영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과다했다. 비용을 지나치게 많이 지출했으며, 짐이 늘어나자 1639년에 엄청난 가격인 13,000 길더의 3층짜리 큰 집을 샀다. 연리 5%의 이자로 잔금을 5년이나 6년 이내에 치르기로 약속했는데 현명하지 못했다. 

개인사에도 운명의 시샘이 잇달았다. 1640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태어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식을 셋이나 잃었다. 결정적으로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한 살 된 막내아들 타투스만 남기고 결핵으로 죽었다. 렘브란트가 36세 때 벌어진 일이다. 그는 무너졌다. 이후 자신만의 작품세계에 더욱 몰두했는데 이것이 ‘이단’이자 오만으로 비쳤다. 사스키아가 죽고 렘브란트가 힘겨운 시절을 보낼 때인 1648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채무 변제에 응하지 않던 영국의 크롬웰이 1651년에 항해 조례(“영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건은 생산국 선박, 또는 영국 배로만 실어와야 한다”는 규정)를 통과시켰다. 식민지 무역의 주도권을 놓고 영국이 네덜란드의 바닷길을 봉쇄한 조치였다. 이어 영란전쟁으로 발전했다. 결국, 바닷길이 막힌 네덜란드의 경제 환경이 악화되고 렘브란트도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했다. 

 

17세기 초 동인도 회사는 아프리카와 인도, 인도네시아 군도와 일본과의 무역 독점권을 행사했다. 수도 암스테르담은 북유럽의 상업 중심지였던 가톨릭 도시 안트베르펜을 제치고 네덜란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금융산업이 특화되었다. 그러자 부르주아들은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다. ‘심원한 인간성’을 추구했던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박한 감상주의로 치부했다. 사람들이 점차 그에게서 멀어져 가자 <도살된 황소(1655)>에서처럼 우울한 분위기가 화폭을 지배했다. 1654년, 새로 들어온 가정부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딸 코르넬리아)를 낳자 주위의 손가락질이 극에 달했다. 스토펠스는 교회로부터 중징계를 받고 따돌림을 당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투자한 배가 들어오기만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상선이 난파하자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1656년 '해상 손실'이라는 이름 아래 결국, 파산했고 모아 둔 재산은 경매 처분했다. 집은 1658년에 처분했다. (지금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클라우디우스 키빌리스(1661~1662)와 최초 스케치의 비교

<클라우디우스 키빌리스>는 렘브란트의 가장 큰 대작(6x5m)이 될 뻔했다. 그러나 크기가 1/3(2x3m)로 줄어든 채 네덜란드가 아닌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미술관에 전시되었다. 렘브란트 본인뿐 아니라, 네덜란드 미술계의 큰 아쉬움이다. 독립 후 암스테르담시는 불이 난 구청사 대신 신청사를 짓기로 했다. 이때 제자 플링크가 천장이 높은 복도를 장식하는 거대한 작품 12점을 의뢰받았다. 그중 8점은 서기 69년 로마에 대항했던 네덜란드의 옛 거주민 바타비아인의 이야기를 대연회장에 걸기로 했다. 스페인에 대항한 ‘진정한 공화국의 자유’를 예찬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1660년 2월 플링크가 일부 그림들의 스케치만 끝낸 상태에서 사망했다. 작가 재선정에 들어갔다. 당시 렘브란트는 미술 시장의 취향 변화에 밀려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시는 18개월간 고심 끝에 연작 첫 번째 ‘투쟁을 서약하는 장면’을 그에게 맡겼다.

렘브란트는 자신에게 다시없는 기회라는 점을 절절히 이해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주인공 키빌리스를 중심으로 자유를 향한 거친 열망을 폭발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맹세를 위해 칼집에서 뽑은 검들이 부딪치고, 술잔에는 포도주가 넘쳐흐른다. 어두운 갤러리에서 에너지가 펄펄 끓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숲을 그리는 대신, 뒤편 아치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실제 숲을 배경으로 삼았다. 키빌리스의 굳센 의지는 꾹꾹 눌러 겹칠 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보석과 실크, 황금으로 치장하여 권위를 부여했다. 거친 원시적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술잔의 투명한 묘사 등 디테일도 완벽했다.

그러나 시에서는 세계 최고의 해상 강국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신청사 걸릴 벽화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1년 동안 전시되던 작품을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애꾸눈을 정면으로 향한 클라우디우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늙은이, 거무스레한 피부의 인물, 마치 산적 떼 행색이었다. 렘브란트가 평범한 사람을 모델로 써서 시민들과 동질감을 유도한 결과이다. 결국, 작품은 재계약에 실패했고, 렘브란트가 보유하게 되었다. 구매자가 원하는 그림과 작가 정신이 충돌한 경우다. 그림은 팔기 적당한 크기로 잘렸다. 원작의 의도를 구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렘브란트로선 재기와 함께 위대한 역사화 제작이란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잘린 그림은 그가 죽고 65년이 지난 1734년 당시 고급 침대 가격 정도인 60길더에 팔렸다. 그렇게 작품은 1,000km나 떨어진 북방 스톡홀름으로 유배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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