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Jan Vermeer, 1632~1675)의 독창성이 나타난 작품은 풍경화가 아니다. 실내 장면이다. 그중 일상에서의 몰입은 1656년부터 선택한 모티브였다. 게라르트 테르 보르흐 등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로부터 받은 자극에서 출발했다. <레이스 뜨는 여인>,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우유 따르는 여인>이 이에 해당한다. 빛과 함께 신비롭게 담아내는 색조에서 그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에서는 고요함 속에서 전해지는 디테일의 힘이 느껴진다. 차분함을 전달하는 파란빛은 벽면과 의자 등받이 대갈못으로 조용히 번진다. 한편 임신을 의심케 하는 여성의 짧은 옷소매 사이로 드러난 가는 팔목과 편지를 꽉 쥔 손가락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지도와 빈 의자는 남편의 부재(不在)를 암시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생략한 점도 그의 매력이다.
단순한 벽면을 배경으로 젊은 여인을 클로즈업한 <레이스 뜨는 여인>은 베르메르가 잘 사용하지 않는 구성이다. 노란 웃옷을 입고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여인은 화가의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보빈(거친 실이나 꼰 실 따위를 감는 데 쓰는 통 모양의 실패)과 바늘에 온통 집중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우유 따르는 여인>이 좋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는 투박하지만, 유순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기존의 실내 모습과는 달리 장식이 없는 검소한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의 묘사가 찬란하다. 빵, 바구니, 그리고 질그릇 주전자에 노란색, 베이지색, 흰색 물감을 조그만 붓으로 느슨하게 찍어 바르는 특수한 기법을 사용하여 손에 잡힐 듯한 사실감을 보여준다. 게다가 베르메르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처음 벽에 그렸던 지도를 지웠다. (노르베르트 슈나이더, <얀 베르메르>) 가장 강렬한 빛이 쏟아지는 빵의 다채로운 색조도 일품이지만, 넓은 벽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단계적인 색조 변화를 보여준다. 심지어 벽에 박은 못의 그림자까지 완벽하게 처리했다. 이로써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일상에 경건함을 부여했고, 화가의 명성과는 별개로 비평가로부터 변함없는 극찬을 받았다. 1907년 이 그림이 외국으로 팔리자 국가적인 차원의 스캔들이 발생했다. 결국, 네덜란드 정부는 1908년에 다시 사들여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했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반면, 대조적인 분위기를 담은 작품이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이다. 두상을 부각해 그리는 바로크 시대의 초상화 양식, 트로니(Tronie)라고 한다. 얼굴의 윤곽선이 없는 부드러운 색조 변화를 담아 ‘북유럽(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 불린다. 역동성은 없어도 극적인 명암 대비를 통해 인물의 생동감을 자아냈고, 극사실적 정물화 표현 기법을 썼다. 청순한 듯 매혹적인 소녀의 옆모습을 클로즈업했는데 순결과 순수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터키식 터번을 쓰고 무엇을 말하려는 듯 반쯤 벌린 입술이 묘하게 순수를 거스른다. 그래서 작품이 더 유명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빛에 의해 반사되는 귀걸이는 단 두 번의 붓 터치로 그렸다고 한다. (김필규, <서양 명화 101>) 그러나 그 외 소도구나 장식물이 없어 소녀의 신분적 배경을 눈치채기 어렵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장편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를 썼다. 그녀가 귀족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였으며, 베르메르와 부적절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줄거리다. 귀걸이는 화가가 선물한 것으로 꾸몄다. 진주 목걸이가 허영심을 상징하고 불륜과 매춘이 베르메르 작품에서도 빠지지 않았던 주제였으니 그럴듯하다. 궁금하면, 영화로라도 한번 볼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바로크 회화의 특징 중 하나가 알레고리(寓意)의 풍성함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추상적 관념을 드러내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는 베르메르의 회화 기법상 몇 가지 전형(典型)이 나타난다. 먼저 창문은 빛으로 대신하거나 있어도 바깥 풍경은 안 보인다. 벽에 지도를 걸어 암시를 주며, 바닥 바둑판 타일을 이용하여 정확히 계산된 원근법으로 공간의 깊이를 부여했다. 알레고리로는 왼편 파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트럼펫과 황금색 책을 들고 있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아홉 명의 무사이(뮤즈) 중 한 명으로 ‘역사와 영웅시를 관장하는 여신’ 클레오다.
일부에서는 탁자 위에 놓인 마스크가 '조각'을 상징한다며 회화의 우월함을 보여주려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비약이다. 그림은 네덜란드 독립 이후 프랑스 루이 14세가 침략의 기회를 넘보고 있을 때 그렸다. 그러니 작가의 펄펄 끓는 애국심이 담겼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목과는 달리 여신은 회화보다 '역사의 알레고리'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일단 화가의 복장이 16세기 부르고뉴 의상이다. 지도는 에스파냐에서 분리 독립하기 이전 네덜란드 17개 주이다. 옛 부르고뉴 공국 시절 통일된 네덜란드를 환기하고자 했다. 양편에 작게 그려진 도시들의 모습을 배치하여 네덜란드와 그 도시들의 영광을 기원하는 듯하다. 특히 헤이그의 네덜란드 왕궁 그림 앞에 클레오 여신이 트럼펫으로 영광을 찬양하는 듯하다. 또한, 전면에 다채로운 무늬의 커튼이 젖혀져 있는 것은 무대의 막이 올라 영광은 지금 진행 중이란 의미일 수 있다. 이 모든 점을 종합해 보면, ‘역사를 기록한다(혹은 증언한다)’라는 평가에 힘이 실린다. 그럼, 뒷모습의 화가는 베르메르의 자화상인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짓기에는 두 가지 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첫 째는 작업 마지막 단계에 사용하는 팔목 고정대를 왜 시작 시점에 등장했느냐이다. 두 번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스케치북이다. 그는 작품을 위해 단 한 점의 드로잉 습작을 그린 적이 없다. (다니엘 아라스, <서양미술사의 재발견>) 따라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즉 '회화의 알레고리'라고 고집한다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역사화의 전통을 이어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신념의 알레고리(1671~1674)>에서 신념은 종교적 신념이다. 신교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았던 베르메르가 십자가와 성경으로 무장한 여인이 선악과를 걷어차고 뱀을 짓밟는 내용은 또 다른 알레고리다.
마침내 1672년부터 1678년까지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수도 암스테르담이 위기에 빠지자 100년 전에 사용했던 전술, 즉 제방을 다시 터뜨렸다. 넓은 지역이 수몰되면서 베르메르 가족은 정기 수입원이던 스혼호벤 근방 농지가 물에 잠겨 소작료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간 열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베르메르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몰입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1653년 델프트 근처 작은 마을 스히플로이에서 카타리나 볼네스와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생긴 경제적 여유 덕분이었다.
칼뱅파였던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장모 마리아 틴스의 마음을 얻은 후 1660년 예수회 선교회가 있는 오우데 랑헨데이크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당시 장모는 벽돌 공장과 부동산, 여러 종류의 투자, 금융자산 등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남편 레이니르 볼네스와는 폭력 문제로 별거(혹은 이혼) 중이었다. 그리고 1661년 여동생 코르넬리아의 재산을 상속받아 여러 곳에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스혼호벤 근처의 농장 ‘봉 르파’를 세놓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1672년 이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아 수입이 끊겼다. 델프트의 쇠락, 1654년 화약고 폭발사고, 전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1675년 암스테르담에서 1,000길더를 빌려야만 했다. 베르메르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으로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결국, 빚만 남긴 채 그해 12월 15일,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파산 선고를 받은 아내 카타리나 볼네스는 11명의 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그림 모두를 처분해야 했다. 그래 보았자 외상값 담보물로 넘어가고 이 작품 <회화의 기술, 알레고리>와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 두 점뿐이었다.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 하나를 덧붙이면, 100여 년이 지난 1793년 프랑스 혁명군이 진격해 왔을 때 네덜란드가 다시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제방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프랑스가 에스파냐의 전례를 기억하고 있었고, 겨울철이어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바닷물이지만, 물이 고여 파도가 잔잔해져 사흘간 불어닥친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었다. (이원복, <새 먼 나라 이웃 나라(네덜란드 편)>
1668년은 아이작 뉴턴이 굴절 망원경의 성능을 대폭 향상했다. 문학과 지리학이 해양 활동에 필수적인 학문이었을 때 이룬 발전이다. 루이 14세도 1667년부터 1672년 사이 파리에 천문대를 건립했는데, 베르메르는 이 기간 중에 <천문학자>와 <지리학자> 두 작품을 모두 완성했다. 직업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 작품들은 그 당시 과학(정확히 말하면 '자연철학')과 과학자 초상화가 인기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델을 둘러싸고 많은 주장이 엇갈린다. 그러나 작품에 앞서 작가 자신이 신비롭다. 자화상이 없고 개인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궁금증을 더 부채질한다. 그래서 모델이 베르메르 자신 아니냐는 추측까지 생겼다. 분명한 것은 당시 네덜란드가 해양대국으로 성장한 배경에 번성한 인문주의와 과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작품에 동원한 소도구들은 화상이었던 그의 아버지 덕분이다. 베르메르가 경제 사정이 좋았던 이유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직공장 직조공과 여관을 운영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말년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의 여유는 처가 덕분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