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메르를 향한 프루스트의 사랑

<델프트 풍경>과 <레이스 뜨는 여인>

by 노인영

베르메르의 작품 수는 매우 적다. 1년에 평균 두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손이 느렸고, 전업화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술시장에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고, 후원자나 애호가들을 위해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진위 논란 없이 확실한 그의 작품은 유화 32점이 전부다. 풍경화는 단 두 점인데, 그중 하나가 유명한 <델프트 풍경>이다. 프랑스어 ‘풍경(paysage)’이란 말이 재밌다. ‘지방’(pays)과 ‘얼굴’(visage)의 합성어다. 즉 풍경화는 한 지방의 초상화라는 의미로, 베르메르는 그가 낳고 자란 델프트 지방의 초상화를 그린 셈이다.


<델프트 풍경(1660~1661)>

델프트는 17세기 후반 중요한 예술 도시로 부상했다. 양탄자 제조업과 맥주 양조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출품 도자기 제조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다. 작품은 델프트 남쪽 스히(Schie)강 건너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도시의 옆모습을 담았다. 채 밝아오지 않은 이른 아침이다. 스히담(Schiedam) 수문에 붙어 있는 시계가 7시 10분을 가리킨다. 화면 중앙 수문을 기준으로 왼편에 베르메르가 묻힌 구교회 성당(Oude Kerk)이 있다. 오른편으로는 약 109m 높이로 우뚝 솟은 첨탑이 아침 햇살에 밝게 드러난 신교회(Nieuwe Krek)가 사이 좋게 조화를 이룬다. 마르크트 광장에 위치한 이곳엔 오라네 공 윌리엄 1세를 비롯하여 네덜란드 통치자의 납골당이 있어 유명하다.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며 편안함을 주는 구도이다. 구름, 건물과 배, 물에 비치는 조화로운 영상, 모두 빛과 공기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로 입체감이 생생하고 사실적이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풍경화 값이 평균 16.5길더가량인데 비해 베르메르 사후 1696년 5월 16일 자 경매 목록 32번에 등재된 그림값은 이 보다 상당히 높은 200길더였다. (노르베르트 슈나이더, <얀 베르메르>)


풍경은 고대에서 16세기까지 인물 뒤 장식처럼 머물렀다.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는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배경이었을 뿐이다. 17세기 초 이탈리아 안니발레 카리치에 의해 ‘구성’이란 요소가 만들어졌고, ‘역사 풍경화’ 또는 ‘영웅 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그리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맞아 자연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탐구하면서 전문적인 풍경화가가 등장했다. 프랑스 살롱전에서 부상(副賞)인 로마상에 '역사풍경' 부문이 만들어진 때는 1817년이 되어서다. 그 첫 번째 수상자는 미샬롱이었다.

그러나 북유럽 화가들 사이에서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그리는 회화적 기법은 17세기에 일찌감치 자리매김했다. 그 절정에 ‘기하학과 빛의 기적’ <델프트 풍경>이 위치한다. 베르메르는 몇 가지 안 되는 안료만 사용해서 풍경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흰색, 노란색, 황토색, 값비싼 자연의 울트라마린(Ultramarine), 그리고 적자색(赤紫色) 염료 ‘매더 레이크(madder lake)’. 그중 신교회 오른쪽 노란 벽이 가장 유명하다.


사후 200년 넘게 무명으로 있었던 베르메르가 떠오른 게 된 데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2~1922)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루스트는 말년에 베르메르의 그림에 매혹되었다. 1920년 프루스트는 친구 베르트랑 드 페넬롱과 함께 헤이그 마우리초이스 미술관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델프트 풍경>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연애편지(1669)>와 <편지를 읽고 있는 젊은 여인(1657년경)>을 감상했다. 그가 "헤이그의 박물관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고 크게 감탄했는데, 바로 <델프트 풍경>이다. 그후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4편 ‘갇힌 여인’에서 당시 파리에서 접한 <델프트 풍경>에서 느꼈던 감동을 독자에게 이렇게 전한다.


“오래 앓고 있던 작가 베르고트가 안정하라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무리해서 파리의 전시회에 걸린 이 그림을 찾아왔다. 드디어 노란색의 작은 벽면의 값진 마티에르(재료, 재질)를 발견한 그는 되뇌었다. “나도 이처럼 글을 썼어야 했어. 나의 최근 작품들은 너무 건조해. 더 많은 색채를 이용해서 나의 언어들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야 했어.” 그러는 사이에 육중한 혼미함이 그를 덮쳤다. (...) 그는 숨을 거두었다.”


베르메르 레이스 짜는 여인 1669 1671.PNG <레이스 뜨는 여인(Lacemaker, 1669~1671)>

그러나 20세기 최고의 소설가 프루스트가 베르메르를 좀 더 세상으로 내보내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 작품은 뜻밖에 <레이스 뜨는 여인>이다. 사후 약 100년이 지나 베르메르 특유의 사실주의적 미학을 세상에 소개한 인물은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술평론가인 토레뷔르거(Thoré-Bürger, 테오위르 토레, 별명 윌리엄 뷔르가)이다. 1866년 파리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 200점 이상을 모은 대구모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베르메르의 작품 11점(위작 포함)이 큰 화제를 모았다.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토레 뷔르거가 배후에 있었고(고바야시 요리코·구치키 유리코,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전시회가 끝난 후 그는 베르메르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 <반 데르 메르 드 델프트>를 발표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베르메르의 명성이 커지고, 1870년 루브르 박물관 측에서 <레이스 뜨는 여인>을 샀다. 세월이 더 지나 프루스트가 루브르에서 이 그림을 보고 1920년 2월 초 작가이자 예술비평가인 장 루이 보드와이에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소망을 전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들의 다른 작품과 함께 걸려 있을 것이 아니라, 대작으로 단독으로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1921년 파리의 주 드 폼 미술관에서 열린 네덜란드 회화전이 열렸다. 마우리 초이스 미술관이 소장하던 베르메르 작품 두 점과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이 새롭게 소장한 <우유 따르는 여인>이 전시되었다. 이와 관련 일간지 <로피니옹> 4월 30일 자에 친구 보드와이에의 에세이 <비밀에 찬 베르메르>가 실렸다. 자신의 제의에 귀 기울여 준 친구에게 감동한 프루스트는 바로 감사의 서신을 보냈다.


“이 전대미문의 대가를 그토록 정당하게 평가하리라고는 감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기관지염을 치료받지 못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전시회가 갈 처지가 못 되는 프루스트는 <로피니옹> 5월 7일 자와 14일 자 <비밀에 찬 베르메르>도 기쁨에 차서 읽었다. 이때 기가 막힐 일이 벌어졌다. 스무 살 때부터 30년을 넘게 지니고 있었던 ‘아침 8시에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깨졌다. 그러면서 프루스트는 보드와이에에게 죽은 몸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가 주신다면, ‘9시 15분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아니타 알부스, <마술의 그림들>) 그가 죽기 5개월 전, <로피니옹>에 실렸던 친구의 기고문을 다시 보면서 베르메르와 와토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그리고 베르메르의 많은 작품이 실려 있는 벨기에 책 한 권을 구했고, 그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1922년 11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은 직접 원작을 사서 감상하며 만족감 이상의 어떤 풍요를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간절한 사람에겐 책이나 카드에 인쇄된 그림 한 장에서도 영감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다. 재능보다 중요한 덕목은 관심과 집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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