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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20. 2021

렘브란트의 아내, 그리고 평행이론

<플로라>와 <자화상>

<플로라(1659)>

렘브란트는 ‘꽃의 여신’ 플로라를 주제로 모두 네 작품을 남겼다. 모두 아내를 모델로 했다. 결혼한 해인 1634년 <플로라로 꾸민 사스키아>로 시작했다. 이후 1635년, 1641년, 사스키아를 총 세 번을 그렸다. 가장 마지막에 그린 <플로라>는 두 번째 부인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을 모델로 했다. 플로라라 하면, 다채로운 꽃으로 수놓은 옷을 입은 보티첼리의 작품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 플로라의 구성은 티치아노의 <플로라(1515?)>에서 따왔다. 왼손을 배 위에, 꽃을 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자세가 그렇다. 하지만 관능적인 플로라가 아니다. 여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다.

<플로라로 꾸민 사스키아(1634)>

사스키아의 자수 의상과 액세서리가 화려하다. 반면 빈곤에 시달릴 때 헨드리키에는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평범하다. 하지만 당당하다. 렘브란트는 헨드리키에와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았다. 재혼하면 사스키아의 유산 상속인으로서 자격을 잃기 때문이다. 파산 선고를 받은 처지에서 유산 4,575프로린이 절실했다. 주변에선 이런 까닭을 이해하지 못했다. 딸 코르넬리아를 임신했을 때 가정부이면서 렘브란트와 부도덕한 관계를 맺었다며 교회위원회에서 헨드리키에를 간음죄로 소환했다. 종교적으로 엄격한 칼뱅파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그녀는 중징계를 받았다.

차제 빈곤이 깊어 가자 재산을 빼돌려 헨드리키에와 아들 티투스로 하여금 미술품 거래회사를 설립케 했다. 그리고 렘브란트를 고용하는 형식을 밟아 작품 활동을 도왔다. 이 점도 그가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원인으로 작동했다. 당시 신흥 네덜란드 공화국은 무역을 기반으로 한 황금시대였다. 상업 부르주아가 미술 시장의 주요 패트런이었다. 


또한 화려한 장식과 자극적인 구도가 환영받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다가 렘브란트는 시대적 취향을 따르지 않고 내면에 천착했다. 빈곤은 갈수록 깊어 갔다. 그는 사스키아에 그랬던 것처럼 핸드리키에게도 애정이 깊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서 오직 인내 하나로 견뎌온 아내의 모습을 거짓으로 치장할 수는 없었다. 꽃의 여신 플로라의 모습이 더욱 정숙하고 내면의 깊이가 충만한 이유이다.

<입욕하는 밧세바(Bathsheba, 1654)>

이전 그림 <입욕하는 밧세바>도 마찬가지다. 다윗과 만남에 결정적인 모티브가 된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담았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다윗의 초대를 받곤 남편 우리야 사이에서 번민으로 가득 찬 그 순간을 기가 막히게 옮겼다. 렘브란트의 가장 큰 누드 작품임에도, 전혀 관능미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케네스 클락은 이렇게 평가했다.


“밧세바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통찰은 ‘서양 회화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다. 오늘날 의사는 모델인 헨드리케에가 유선염에 걸려 있는 듯하다고 진단한다. 그녀의 왼쪽 유방의 바깥쪽 아래 검게 그늘진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고, 겨드랑이 부분도 불룩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림프절 종대가 의심된다는 소견이다. 유방암이라면 3기에 해당하는데, 그림이 그려진 후 11년을 더 살다 1663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아무래도 유방암보다는 유선염이라는 판단이다. (한성구, <그림 속의 의학>) 사랑하는 여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면서 질병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낸 렘브란트의 태도는 <라 포르나리나>를 그린 라파엘로를 닮았다.

 

사스키아가 죽고 렘브란트가 힘겨운 시절을 보낼 때 영국의 항해 조례 및 세 차례 전투 끝에 네덜란드가 패했다. 그의 삶처럼 조국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저물었다. 이후 영국으로 옮겨 간 해는 떨어질 줄 몰랐다. 1663년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더욱 내면의 세계에 몰입했다. 이어 1668년 자신을 끝까지 보살펴 주던 아들 티투스 반 레인도 흑사병으로 스물일곱에 죽었다. 이제 그의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듬해인 1669년, 그가 64세가 되든 해 몸을 의지했던 며느리의 집을 떠나 저세상으로 떠났다. 쓸쓸히, 그것도 아주 쓸쓸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향했다.


<유대인 신부(1666?)>

“2주일간 계속 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내어줄 텐데···”


1885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말년 작품 <유대인 신부>를 보고 고흐가 쏟아낸 감탄이다. 작품은 자전적 그림을 그려 온 렘브란트의 특성에 비추어 아들 타투스와 며느리, 혹은 암스테르담의 시인 미구엘 데 바리오스와 그의 아내 등 의견이 다양하다. 그러나 호사가들의 관심일 뿐이다. 조심스럽게 “그림의 역사에서 영적·육체적 사랑의 부드러운 융합을 이룬 대작 중 하나”라는 평가(렘브란트 전기 작가 크리스토퍼 화이트)에 동의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내면에 솔직했다. 생전에 자화상을 백여 점 그렸다. 34세 성공한 화가의 야심과 노년의 쓸쓸함이 배어 있는 우측 <웃고 있는 자화상(제우크시스의 모습을 한 자화상, 1665)>까지 모두 꾸밈이 없다. 특히 예순여섯 살 마지막 자화상인 이 작품에서는 그가 웃고 있어 더욱 가슴 아리다. 말년에 가족과 재산, 그리고 명예를 잃었지만, 화가의 자존심은 끝까지 지켜냈다. 그의 고향 레이덴이 에스파냐에 저항했던 것처럼.

 

18세기에 이르러 미술은 뒤늦게 후견인으로부터 점차 독립적이 되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에게 향하는 빛을 들라크루아, 모네, 고흐 등 후배 작가들에게 돌리고, 그림자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그의 조국 네덜란드도 1672년부터 1678년까지 프랑스와 두 차례 전쟁 끝에 또 패하면서 이등 국가로 전락했다.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 우주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다. 국운도 이 진리를 피해 갈 수 없는 모양이다. 여기까지가 렘브란트와 네덜란드의 '평행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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