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독일로 갔던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루벤스는 가족과 함께 고향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 결정은 화가 루벤스에겐 행운으로 작용했다. 16세기 북해를 이어주던 츠빈강이 모래에 잠기면서 항구의 기능을 상실한 브뤼헤가 국제적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었다. 이후 북유럽 최고의 도시로 성장한 곳이 안트베르펜이다. 지금의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유럽의 모직물과 양모, 동방에서 온 향신료, 비단, 다이아몬드가 거래되던 세계적 시장이었다. 또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의 전선이 홀란트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이곳 벨기에 지방은 피해가 적었다. 작품 활동에만 몰입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1587년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인 벨기에 지역은 독립을 보장받고 에스파냐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신교를 지지하던 북부 7개 주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결의하고 에스파냐와 독립전쟁을 벌이기 1년 전 일이다.
1600년이 되자 스물세 살 루벤스는 유럽 회화의 주류인 이탈리아로 떠났다. 베네치아에서 배우고, 만토바에서 예술가와 외교관으로서 살았다. 1601년 말부터 1년 넘게 로마에 머무를 때 그는 티치아노와 미켈란젤로를 연구했고, 틴토레토, 카라치, 그리고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1605년 카라치는 중병에 걸려 큰 작업을 할 수 없었고, 카라바조는 1606년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녔다. 로마의 빈자리를 루벤스가 채웠다. 발리첼라에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의 제단화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성모(1608)>를 완성했다. 그는 그림이 설치된 바로 그 장소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 성당 내 빛의 관계를 제대로 활용했다. 그리고 제단화 중앙을 활 모양으로 구성하여 인물들이 마치 표면을 뚫고 나오는 듯 착시 효과를 냈다. 그림과 이를 감상하는 신자를 같은 공간으로 연결함으로써 울림을 선물한 것이다.
로마에서 발전을 이룬 그는 이탈리아에 계속 남으려 했다. 그러나 1608년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안트베르펜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그의 기량은 알프스 이북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듬해 그곳 시장이자 장로인 나콜라스 로콕스가 의뢰한 <삼손과 데릴라(1609)>와 사내의 손 위에 얹힌 여인의 손이 우아한 <인동 나무 그늘에 있는 루벤스와 그의 아내>를 완성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그림이다. 사랑과 결혼을 상징하는 손을 표현한 이사벨라 브랜트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18살 때 32살 루벤스의 신부가 되었다.
루벤스가 17세기 바로크 시대 최고의 플랑드르 화가로 대접받게 하는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 <라오콘>을 모방한 것으로, 예수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왼쪽 패널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역시 세례자 요한을 임신 중인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오른쪽 날개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모습이다. 따라서 양 날개는 그리스도의 삶의 첫 장을, 중앙 패널은 삶의 마지막 장을 묘사했다. 나에겐 일본 만화영화로 접했던 필명 위다의 동화 <플랜더스(플랑드르)의 개>에서 부모를 여의고 가난했던 소년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다. 추운 겨울날, <아베마리아>가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가운데 마침내 그림을 보게 된 네로가 애견(愛犬) 파트라슈를 꼭 앉고 “이제 죽어도 좋다”라며 언 몸이 스러져갔던 바로 그 작품이다.
그의 기념비적인 세 폭 제단화는 나폴레옹이 가져갔지만, 19세기 말에 반환되어 지금은 원래의 자리인 벨기에 안트베르펜 성모 성당에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던 밝게 타오르는 붉은 색채, 배경의 검은 구름과 예수의 육신을 비추는 강한 햇빛, 보는 이의 시선을 예수에게 집중케 한 구성이 돋보이는 유럽 최고의 종교화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바로크적인 곡선과 역동감을 살린 명암법 등 비극적인 테마를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미 바로크의 대가 카라바조와 안니발레 카라치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의 수난에 함께 임한 세 명의 마리아가 하단에 묘사되었다.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마리아'다. 이 한 명이 누구인가를 두고 복음서의 의견이 갈린다고 한다. '어린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혹은 성모 마리아의 자매인 '콜레오파스의 마리아'이다. 이 모호한 언급을 화폭에 옮겼던 엘 그레코가 송사에 휩쓸린지 30여 년 만에 루벤스의 화폭에 재등장했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룬 <십자가에 매달림(1610)>에서도 금발의 막달라 마리아가 왼쪽 패널 전경에 나타난다. 그런데 그녀는 왜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을까? (최상운, <플랑드르 미술 여행>) 마리아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루벤스의 삶은 가난한 네로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경제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예의범절이 바른 그는 외교관이기도 했는데, 그의 친구였던 에스파냐의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장군은 “그의 모든 재능 가운데 회화는 가장 하찮은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질 네레,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30년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평화협상을 성사시켜 그해 찰스 1세, 1631년 필리프 4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것은 화가 이상이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유럽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 못 해 100명이 넘는 조수와 함께 공방에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한 작품을 공동으로 완성하는 방식은 17세기에 특히 네덜란드 남부 지방에서 발달하였다. 현대미술에서 앤디 워홀과 같은 대량 생산체계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화환의 성모자>, <꽃다발과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인 마리아와 아기 예수(1620년경)> 등에서 꽃은 대(大) 피테르 브뤼헬의 둘째 아들 얀 브뤼헬 1세가 그렸다.
그는 루벤스보다 아홉 살 많은 친구였으며, 당시 세밀화가로서 그의 솜씨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특히 꽃을 잘 그려 '벨벳'의 브뤼헐이라고 불렸다. 순수 정물화로서 꽃은 17세기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가톨릭 수호국가의 장자인 신성로마제국 통치하에서 종교적 요청으로 인해 꽃과 종교화, 특히 성모자상과 융합했다. 이후 양식이 진화하면서 꽃은 정물화로, 인물은 역사화로, 자연은 풍경화로 독립한다. 그중 정물화는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용도로 인기를 끌었다.
동물화가로는 <메두사의 머리(1617~1618)>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1610~1612)>를 협업한 프란스 스나이더스(스네이데르스)와 파울 데 보스, 그리고 정물화가이자 풍경화가로는 얀 브뤼헐와 함께 얀 빌레가 꼽힌다. 이외에도 1632년부터 찰스 1세 궁정화가로 런던에서 활동했던 안톤 반 다이크와 야코프 요르단스처럼 훗날 독자적으로 유명해지는 쟁쟁한 화가들이 공방에 모여 있었다. 루벤스는 먼저 초크로 드로잉을 하고, 채색을 지시했으며, 직접 마무리했다. 그리고 협업자에게 맡긴 전담 분야를 구매자와 계약 시 솔직히 알린 후 가격을 결정했다. 반면 루벤스의 서명은 있되, 그가 전혀 손대지 않은 작품들도 있었다. 저렴한 B급 작품들이다. 여하튼 완성도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협업 시스템이며, 물론 대외적으로는 루벤스 이름으로 팔렸다.
루벤스는 외교관으로 집을 자주 비우기는 했지만, 충실한 지아비이자 가장이었다. 그러나 1626년 흑사병으로 이사벨라가 죽었다. 1630년 재혼을 결심하면서 그는 친구 페이레스크에게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자신은 귀족과 결혼할 수도 있지만, “손에 붓을 든 나를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여인이 더 좋다”고 말했다. 쉰세 살임에도 37살이나 어린 열여섯 살 헬레네 프르망(알레나 포르먼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세련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었다. 그렇다고 죄도 아닌 예술가 특유의 감성, 특히 성에 대한 욕구를 구태여 숨기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안트베르펜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소문난 헬레네의 젊음과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헬레네는 <밀짚모자(1622~1625>의 주인공 수잔나 푸르망의 여동생이다. 미모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에 있어서 남편과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풍부한 지혜를 갖춘 여인이었다. 루벤스의 요구에 기꺼이 호응하여 부끄러운 듯 벗은 몸으로 포즈를 취해주었다. <모피 코트를 입은 여인>이 그것이다. 존경했던 티치아노 풍으로 그렸다. 당시로선 누드모델로 나서기에는 조심스러울 때였다. 그러나 루벤스로서는 팔 작품이 아니었다. 이 점은 1640년 그가 통풍이 재발하여 죽으면서 유언으로도 분명히 못을 박아 두었다. 결국, 작품은 헬레네 본인에게 넘어갔다.
<삼손과 데릴라>에서 보여주었던 모피가 다시 등장했다. 모피는 그 질감만으로도 에로틱한 느낌이 전해진다. 또한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성적 상징성은 뚜렷하다. 그녀는 모피로 허리와 중요 부분을 감쌌다. 그러나 루벤스가 작업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의 나체 묘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루벤스다. 게다가 아내가 모델인데 그녀의 벗은 모습을 굳이 세부적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었다. 헬레네는 ‘정숙한 비너스’ 자세로 부끄러운 듯 가슴을 살짝 가렸다. 그녀의 몸은 풍만하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매우 육감적이고. 루벤스는 그녀를 모델로 종교화와 신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헬레네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한편 아내의 신체적 결점을 애써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른쪽 겨드랑이에 접히는 살, 옴폭 들어간 무릎, 불균형한 젖가슴, 모두 사실적이다. 그림을 팔지 않기에 솔직했던 게 아니다. 그의 성품이 원래 그랬다. 루벤스는 모든 외교 활동을 접고 사랑스러운 아내 헬레네와 함께 1635년 시골로 내려갔다. 점점 빈번하게 발생하는 통풍이 원인으로 작용한 듯하다. 통풍은 마침내 그의 두 손을 마비 상태에 빠트리고 말았다. 메헬렌 근처 엘레웨이트에 있는 스텐 성에서 63세의 루벤스는 '축복받은 삶'을 마감했다. 둘 사이에는 모두 아홉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헬레네에게는 10년의 결혼 생활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