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1567~1618) : 30년 전쟁 이전 전황
14세기 이후 저지대 국가 대부분은 부르고뉴 공작령에 속했고, 이에 포함된 네덜란드는 상속에 의해 자연스럽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1556년 두 아들 중 한 명인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대물림했다. ‘피의 메리’라 불리는 잉글랜드 첫 여왕 메리의 남편이자,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거느린 세계 최강 에스파냐(España, 스페인) 왕국의 지배자인 그는 스물여덟 살 청년이었다. (제목 초상화는 티치아노의 <펠리페 2세의 초상(1550?)>이다)
아버지와와 달리 네덜란드가 아니라 에스파냐에서 자랐으며, 지나칠 정도로 진지했고 부지런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종교적 자유를 허용할 뜻이 전혀 없었다. 개신교를 이단이라 여겼고, 힘으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공의회(1545~1563)가 개최되어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체제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또한 당시에는 국왕이 종교를 선택하면, 백성들은 이를 따라야 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벨기에를 포함한 당시 네덜란드를 섭정하던 인물은 파르마의 마가레트(마르가레테 폰 파르마)였다. 그녀는 아버지 카를 5세의 명에 따라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재위 1532~1537)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살해되자 에스파냐로 피신했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3세(본명 알렉산드로 파르네세)의 손자 오타비오 파르네세와 재혼했으며, 펠리페 2세의 부탁으로 1559년부터 8년간 나라를 비교적 잘 다스렸다.
전쟁의 불씨는1566년 8월에 타올랐다. 칼뱅파의 신자들이 플랑드르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하여 성인의 성상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영주였던 오렌지 공(公) 빌렘 1세의 지방 정부는 그들의 파괴 행위에 온건하게 대처했다. 에스파냐 왕조의 총신(寵臣)인 빌럼 판 오라녜(Willem Van Oranje, 1533~1584, Oranje의 영어 발음이 ‘오렌지’이다)는 종교적 편견이 없었다. 루터파 집안에서 태어나 궁정에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칼뱅파 아내를 맞았다. 다만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심취했고, 종교적 관용이 네덜란드의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1559년 이미 종교적 관용을 청원하였으나 결국, 이로 인해 영지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1567년 3월 13일부터 네덜란드 남북 17개 주가 에스파냐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다. 최초 저항의 성격을 고려하여 ‘반란’이라고 했으나 30년 전쟁을 포함, 1648년 10월 24일까지 전개되었기에 ‘80년 전쟁’이라 불린다. 전투는 주로 북부 홀란트 지역에서 벌어졌다. 귀족과 상인 계급은 물론 전혀 훈련되지 않은 남자들이나 때로는 여자까지도 에스파냐의 정병들과 싸움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자 펠리페 2세가 1567년 8월 22일 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와 1만 명의 병력을 수도 브뤼셀에 주둔시켰다. 알바 공은 에스파냐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16세기 중후반을 대표하는 군인이자 대귀족이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던 문화적 황금기에 그의 카스티야 영지에서 문화적, 종교적 부흥을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네덜란드 반란을 진압하면서 태도가 돌변했다. 정치적으로 뾰족한 답이 없는 상황에서 폭압적인 군사 진압으로 사태를 더 키워버렸다.
그해 9월 사퇴한 마가레트를 대신하여 네덜란드 총독이 된 그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가톨릭 교도지만, 빌럼과 함께 관용적 태도를 보인 에흐몬트와 호른 백작 등 약 18,000명을 화형과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이때부터 알바 공은 ‘지옥의 사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그의 종교재판소를 ‘피의 법정’이라 불렀다. (<나무위키> 참조)
딜렌부르크에서 망명 중이던 오렌지 공이 지휘하면서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알바 공은 전력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모자라는 군비 충당을 위해 새로운 세법, 이른바 ‘1할 세’(모든 판매수익과 토지수익의 1할을 세금으로 납부)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상업 도시가 주를 이루는 네덜란드 주민들로서는 자치권을 빼앗기는 것을 생계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빌렘은 1568년 알바 공의 퇴진을 주장했다.
때마침 1570년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지중해를 공격해 오면서 키프로스가 함락됐다. 에스파냐는 주둔군을 돌려 이를 막아냈으나 이 틈을 이용하여 독립전쟁은 크게 확산되었다. 저항이 거세지자 에스파냐는 레판토 해전에서 승리한 기세로도 수습할 수 없었다. 1573년 결국, 알바 공이 레퀴상스로 교체되었다. 미봉책이었다. 곧바로 복귀한 알바 공이 아들 파드리케(Don Fadrique)와 함께 독립에 찬성한 도시들을 다시 공략했다. 1574년 6월, 에스파냐군은 마지막 남은 도시 레이덴에 도착했다. 이곳 주민들은 1년여를 힘겹게 버티며 이렇게 다짐했다.
“왼손을 잘라먹으면서 오른손으로 우리들의 부녀자와 자유와 신앙을 외적의 압제로부터 지킬 것이다. (…) 운이 다하고 목숨을 부지할 길 없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불을 질러 우리들의 집을 태워 파괴하고, 우리의 자유의 멸망을 눈앞에 맞을 바에는 차라리 남녀노소 모두가 불길 속에 뛰어들어 죽으리라.”
주민들은 성 밖 홀란트 마을에 자신들의 의지를 알리는 전갈을 보냈다. 여러 마을 사람들이 모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단했다. 레이덴을 적의 손에 넘길 바에야 차라리 사랑하는 그 땅을 침수시키는 편을 택했다. 제방을 허물고 북해의 거센 물살을 끌어들였다. 수로가 열리자 네덜란드 함대가 구호품을 갖고 들어와 도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오렌지 공 빌럼이 이끄는 수공작전으로 인해 알바 공의 에스파냐군이 퇴각했고, 주민들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해 1575년에 레이덴 대학이 창립되었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1>)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이제 막 1/10 시점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1575년 파산 상태에 빠진 에스파냐의 군대가 용병에게 지급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안트베르펜(네덜란드어 Antwerpen, 영어 Antwerp 앤트워프)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자 저지대의 북부와 남부 간에 1576년 간트 협약을 체결하고, 신·구교 구별 없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앞에서 언급한 오타비오 파르네제와 마가레트 사이의 아들)가 종교 간 분열책으로 썼다. 그러자 가톨릭 귀족이 이끌던 남부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프랑스의 노르파드칼레 지역)는 아라스 동맹을 결성하여 에스파냐의 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신교도 중심의 북부 7개 주도 이에 대응하여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며 맞섰다.
신교로 개종한 빌렘은 동맹을 이끌며 한때 충성을 바쳤던 에스파냐와 싸웠다. 마침내 1581년 7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반쪽 공화국이었다. 남부 10개 주는 여전히 에스파냐가 지배하고 있었다. 1584년 7월 10일, 빌렘 1세가 필리페 2세의 사주를 받은 가톨릭교도 발타자르 게라트에 의해 델프트에서 암살되었다.
그의 아들 오라녜 공 마우리츠가 독립 전쟁을 계속 이끌었다.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이 이끄는 지원군이 돌아갔으나 스무 살 마우리츠는 에스파냐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588년 칼레 해전과 그라벨린 전투에서 잉글랜드와 연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Armada)를 물리쳤다. 에스파냐는 범선이 130척이고 대포는 2,000문, 병사는 2만 명이 넘는 대함대였다.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에스파냐로서는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후 불과 17년만에 벌어진 대몰락이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해양국가가 아니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인 엘리자베스 1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펠리페 2세의 청혼을 물리친 바 있다. 그리고 이 해전을 통해 변방의 소국 잉글랜드 역사에 변곡점을 가져왔다. 찰스 하워드와 드레이크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이 기동력에서 앞섰다. 드레이크는 노예무역과 에스파냐의 상선에서 약탈한 금과 은을 여왕에게 바쳐 왕실의 재정을 살찌운 인물이다. 덕분에 해전에 징발된 상선과 군사에게 후한 급료를 줄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신형 범선인 레이스 빌트 갈레온(Race-Built Galleon)과 개량형 철제 대포, 그리고 해군의 유기적인 전략전술로 승리했다. (이주희, <강자의 조건>) 도시 국가 밀라노 공국보다 왕실의 연간 수입이 적었던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기반이 이때 구축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1595년에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같은 가톨릭 국가인 듯하나 프랑스에서는 신구교간 대립 양상이 달랐다. 섭정을 했던 메디치 가문의 카테리나가 신·구교의 타협을 종용하면서 비교적 일관되게 균형을 유지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1572년 성 바르톨레메오 축일 밤에 위그노파 귀족과 신도들을 살해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서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 말은 프랑스가 비록 30여 년간 내란 형태의 종교전쟁이 벌어졌지만, 국가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타협의 여지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실제 앙리 4세는 1598년 4월 13일 낭트 칙령을 발포하면서 종교로 인한 내정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반면 그해 펠리페 2세가 암으로 사망한 에스파냐로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가져온 막대한 금과 은을 계속 전쟁에 쏟아부어야만 했다. 가톨릭의 수호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는 것 치곤 지나치게 값비싼 대가였다. 그랬음에도 바닷길을 통한 군수 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마우리츠에게 주요 도시들을 내주어야 했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오늘날과 유사한 국경 형태를 갖추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1609년 휴전과 함께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에스파냐가 먼저 북부 가톨릭 신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같은 조건으로 남부 신교 신도들의 자유를 요구하자 에스파냐가 거부했다. 동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이르는 양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문제에서도 이견을 보였다. 결국, 1621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군주는 펠리페 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