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지 교회는 로마에 사는 프랑스인 공동체를 위해 세워졌다. 그곳 콘타렐리 교회당의 벽화 <예수의 부름을 받는 성 마태오>는 프랑스 추기경 마티외 쿠앵트렐의 10여 년 전 유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당시 29세였던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는 이 벽화를 그리고 나서야 세상으로부터 거장으로 대접받았다. “예수가 지나가다 세리(稅吏) 마태오를 보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예수를 따랐다”는 구절을 이미지로 옮겼다. 이제까지 이젤에 그렸던 그의 풍속화나 정물화와는 비교되지 않는 대작이다. 카라바조도 화가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맞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작품 속 배경은 얼핏 보면 도박꾼 소굴이나 술집 내부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세리가 일하는 곳이다. 왼편 세리는 누가 왔는지도 모르고 코를 박고 동전을 세는데 정신이 없다. 옆에 안경을 걸친 늙은이도 주변에 신경을 쓰지 않긴 매일반이다. 그리스도와 마태오의 역사적인 만남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라는 암시한다. 파격적인 구성은 예수를 베드로와 함께 오른편 구석, 그것도 어둠에 묻어 버렸다. 대신 마태오와 그를 가리키는 예수의 손이 선명하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중 <아담의 탄생>의 하나님 손을 닮았다. 어둠, 그것은 다양한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세리 일행 중앙에 붉은 상의를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마태오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여는 듯하다.
“저 말입니까?”
그 순간, 오른편으로부터 한 줄기 빛이 공간을 가른다.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다.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chiaroxcuro 명암법)는 단순한 빛과 어둠이 아니다. 빛의 변화, 즉 반사(각), 흡수, 역광, 그림자 등을 통해 사물의 질감, 촉감, 부피 나아가 심리 상태까지 다양한 효과를 연출했다. 어둠을 과장하는 기법,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 부르며 한 마디로 극적(劇的)이다. 이전의 고전주의 회화의 화면에는 어두운 구석이 없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어둠은 공포이며, 마력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카라바조도 이성과 자연을 ‘빛’이라 부르며 대상의 외연을 나타내는 윤곽선을 강조했다. (진중권, <앙겔루스 노부스>) 반면 어둠이 가득 차서 윤곽선이 끊겨 형체가 불명료해진 것으로 그의 독창성을 대표했다.
이것은 색채가 데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동했으며, 어둠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완성 후 벽화의 주제인 <성 마태오의 순교>를 그릴 수 있었다. 그림 속 중앙 후경에 검은 수염을 기르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내가 바로 카라바조이다. 에티오피아 왕의 명령으로 제단 앞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마태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선할까, 악할까? 이 본질적인 질문만큼 인류를 끈덕지게 따라다닌 화두는 없다. 이 를 화단에 대입한다면, 악의 편에 서는 대표적 인물이 바로 카라바조이다.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을 통해 우린 이미 베드로의 복잡한 내면에 공감한 바 있다. 어떻게 이토록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을까? 기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카라바조의 본성 역시 복잡했기 때문이다. ‘빛의 마술사’로 불렸지만, 정작 그의 인생이 늘 어둠이었다. 거칠고 폭력적이었으며, 붓만큼이나 칼을 자주 휘둘렀다. 그러나 화가로서 카라바조는 천재였다. 그는 결정적 순간에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듯이 그림을 그렸다. 조금 유식한 말로 회화가 사건의 순간성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마니에리스모(매너리즘) 양식이 지배적이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모사 작품이 대세를 이루었다. 한 마디로 진부했다. 종교개혁에 대응하여 반종교개혁을 기치로 내건 당시 로마 교회는 돌아선 신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둘 성화(聖畵)가 필요했다. 그것은 생생하게 극화된 성화, 바로 카라바조의 그림이었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사전에 밑그림을 그리는 대신, 캔버스에 스케치하고 그 위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초기 <병든 젊은 바쿠스>를 비롯해 인물화와 풍속화를 남겼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당시 권력과 재력을 갖춘 이들이 후견인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일련의 종교화를 그린 후에 일이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는 라파엘로와 비교된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숭고하다면, 그의 그림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진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상의 종교를 지상의 종교로 끌어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역동적인 구도, 사실적인 표현, 밝음과 어둠을 대비시켜 작품의 긴장도를 극적으로 높였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네덜란드의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루벤스, 라투르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직후 카라바조와 더불어 근대 회화가 시작되었다"는 정당한 평가를 받기까지 300년을 기다려야 했다. 살아생전 그의 작품은 수없이 거절당했고, 죽어서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미술사가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밝히는 카라바조의 인생 마지막에 관해 서술해 보자.
1606년 5월 29일, 서른네 살 카라바조가 로마 캄포 마르조의 스크로파 거리에서 칼을 들고 서 있다. 약 열 살쯤 아래인 테르니 출신 라누치오 토마소니와 결투를 위해서다. 싸움은 격렬했고, 라누치오는 카라바조의 칼에 찔려 피를 쏟고 사망한다. 내기 테니스 경기 끝에 속임수를 썼다며 벌어진 결투로 알려졌다. 그러나 라누치오의 상처 부위를 보면, 여자(매춘부) 문제가 연관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여자와 관련된 결투에서는 패한 자의 거세가 전통이었다. 카라바조는 쓰러진 상대방의 중요 부분을 자르는 대신 사타구니 근처 동맥을 찔렀던 것 같다.
피해자나 가해자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하지만 살인이다. 이전의 말썽과는 차원이 달랐다. 결투는 집단 난투극으로 발전했다. 친구 한 명이 칼에 깊숙이 베인 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머리에 칼을 맞아 심한 상처를 입고 현장을 피한 카라바조에게 현상금이 걸렸다. 이제 잡히면 목이 달아날 지경이다. 일단 친척의 영지로 도망쳤다. 그리고 자가롤로, 팔레스트리나를 거쳐 나폴리로 갔다. 기대했던 유력자의 도움은 없었다. 거들어 줄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작품 활동을 하며 8개월을 잘 지내던 카라바조는 1607년 7월, 갑자기 시칠리아 남쪽 지중해의 몰타섬에 도착한다. 그가 5개월을 머물게 되는 그곳은 몰타기사단이 장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