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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22. 2021

안니발레 카라치의 고전성과 근대성

바로크 회화에서는 로마의 카라바조와 볼로냐의 카라치 집안이 대표한다. 그중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의 미술가 가문인 카라치 가(家)에서는 16세기 초반 혁신적인 예술가인 코레조(Coreggio, 1490?~1534)의 빛과 그림자 처리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티치아노가 라파엘로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판단하여 베네치아인들의 채색법을 열심히 수련했다. (리오넬로 벤투리, <미술비평사>) 

집안 화가 중에서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사촌 루도비코(Ludovico)의 공방에서 형 아고스티노(Agostino, 1557~1602)와 함께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 빛의 묘사와 감정 표현을 습득했다. 특히 표정 연구에 노력을 기울여 인물의 내면을 생동감 있게 접근하는 ‘카리카듀라(caricatura)’를 고안했는데 오늘날 ‘캐리커처’의 어원이다. 

그들은 인위적이며 기교적인 마니에리스모 양식을 극복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안니발레도 1580년부터 1581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라파엘로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단순성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안니발레를 일컬어 ‘고전주의적’이라 평가한다. 이렇게 그는 바로크 시대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인 아카데미적 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제목 그림은 <성 매튜와 함께 하는 마돈나(?)>이다)


안니발레와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의 2대 거장으로 불린다. 두 사람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화풍에서는 대조를 보였다. 대중은 곡절이 많았던 카라바조에 경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안니발레 카라치의 영향이 더 컸다. 특히 그의 화풍은 프랑스 푸생의 고전주의로 이어졌고, 프랑스 회화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 두 사람은 1600년경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의 체라시 예배당에서 실제 교류가 있었다. 

 

안니발레 카라치, <성모승천(1600~1601)>

안니발레가 제단화 <성모승천>을 그렸다. 전통적인 빨강과 파랑의 천을 두른 성모의 이상적인 모습은 여전하다. 그리고 볼로냐 화파의 특징인 희미하게 빛나는 색과 테두리는 마치 안개가 낀 듯한 효과를 준다. 그러나 부드러운 시선과 양팔을 활짝 펴고 무덤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모습이 이전과 달리 매우 역동적이다. 열한 명의 사도가 성모의 관을 둘러싸고 있는데 전면 왼편의 베드로와 오른편 바울의 놀라는 표정에서 그의 장점이 잘 표현되었다.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1601)>과 <성 바울의 개종(1600~1601)>

이 제단화는 카라바조가 좌우 측면에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과 <성 바울의 개종>과 호응한다. 두 성자 모두 로마와 깊은 관련이 있고, 같은 날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성 베드로의 십자가 책형)>은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했다는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자처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지는 형 집행 모습이다. 강렬한 색채와 명암, 극적인 구성, 특히 십자가를 세우기 위한 육체적 동작을 경사진 곡선으로 강조했다. 한편 등장인물의 평범함으로 인해 천상의 종교를 지상의 종교로 끌어내렸으며, '연극적 사실주의'라는 말이 실감난다. 고뇌에 찬 베드로의 표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 <성 바울의 개종>은 뜻밖에도 말이 그림 전체의 공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활짝 벌려 아치를 그리는 바울의 팔과 어울려 타원형의 아치를 형성한다. 바울은 신성한 기적에 눈을 감고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다.

 

안니발레는 인물을 이상적 고전주의 형태로, 카라바조는 사실적으로 그려 화풍에서 대조를 이루었다. 성격이 거칠었던 카라바조도 안니발레의 작품을 인정했으며, 서로의 만남을 행운으로 여겼다. 이렇게 출발한 바로크 회화는 르네상스 양식보다 광범위하게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통합된 형태를 보였다. 이어 등장한 로코코 양식만 해도 프랑스와 독일 일부 제한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바로크 양식의 확산은 18세기를 넘어가면서 갑자기 수그러든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푸줏간(1580~1590)> 연작


안니발레는 경직된 고전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의 근대성은 초기 대표작 <푸줏간> 연작에서 확인된다. 당시 대세였던 종교화가 아니라 서민의 삶을 담으면서도 예상외의 대담한 주제를 선정했다. 일단 푸줏간이 그림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재밌다. 인물 묘사도 유쾌하다. 일꾼들이 동물의 시체를 매다는 장면이 풍부한 색채와 빛의 변화를 담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해부학적으로 생생하다. 당시 정물화에 푸줏간이 주제로 자리 잡은 것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인간은 사멸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중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후 작품은 후배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푸줏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제법 생겨났다. 그중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1655)>는 아예 소고기만을 갖고 정물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샤임 수틴은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를 극단적으로 상징한 <가죽을 벗긴 소>를 그려 렘브란트에게 헌정했다.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도미에도 ‘푸줏간’ 연작을 남기는 등 이 작품으로 인해 회화의 소재는 더욱 풍부해지고, 생활과 밀접해졌다. 안니발레의 유화 작품 <콩 먹는 사람>도 인물과 주제 선정에서 매우 현대적이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했다. 

<콩 먹는 사람(1580~1590)>

1582년 카라치 형제와 사촌 루도비코는 미술학교 ‘아카데미아 데이 데시데로시(Desiderosi 열망)’를 설립했다. 후에 ‘아카데미아 델리 인카미나티(Incamminati, 약진)’로 개명했다. 학교는 정해진 교육과정이 없이 학생들이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관찰하며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개방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곳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귀도 레니가 유명하다. 그의 당시 명성은 라파엘로와 비교될 정도로 높았다고 한다. 안니발레는 볼로냐 화파를 이끌며 그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셋은 1589년~1594년 볼로냐를 주 무대로 함께 작업했다. 마그나니 궁전과 삼피에리 궁전에서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파르네세 궁 <신들의 사랑(1597~1608)>

안니발레와 아고스티노 형제는 1595년 로마로 떠나 추기경 오도아르도 파르네세를 만나 주문을 받았다. 그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손자로 교황청 내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10년간 파르네세 궁전(Palazzo Farnese) 그랜드 살롱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했다. 다만 <신들의 사랑> 작업 도중 아고스니토가 작품 관련 의견 충돌로 볼로냐로 돌아갔다. 여하튼 이 프레스코화는 신화를 주제로 한 고전적인 누드화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등 당시 로마의 천장화를 참고로 했다. 신화와 전설의 <변신 이야기>를 쓴 오비디우스(Ovidius)를 회상시키는 이 프레스코화는 이를 능가하는 작품이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의 벽화뿐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 

안니발레 이후 풍경화와 판화, 그리고 초상화에 관한 연구를 이어 나갔다. 말년에 그는 알 수 없는 우울증에 시달려 고통스럽게 작업했다. 1609년 영면했는데 그해부터 바로크가 본격적으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선구자로서 대접을 받았다. 훗날 우수한 유럽 아카데미의 원형이 되는 그의 미술학교의 좌우명은 다음과 같다.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혐오하며, 더 나은 미래를 열망하는 이들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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