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반 유럽에서 전적으로 가톨릭을 신봉하는 지역은 이탈리아반도와 신성로마제국 남부 그리고 에스파냐뿐이었다. 이전까지 누렸던 헤게모니의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교회와 수도원이 지녔던 부가 프로테스탄트에게 넘어가 재정적으로 취약해졌다. 로마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는 ‘반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제7차 이탈리아 전쟁이 벌어지던 1545년 반도 북부 트렌토(Trento 독일어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다. 페스트나 전쟁 또는 정치 상황을 이유로 중단이 되면서 1563년까지 세 차례 진행되었으며 총 25번의 회의가 열렸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생인 교황은 메디치가(家)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레오 10세의 추기경회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원화 전략을 채택했다. 먼저 내부 단속이 이루어졌다. 교회 내 퇴폐와 부패를 근절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면죄부와 성직 매매를 금지했다. 더불어 “오직 믿음만으로 의화(義化,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인이 의로운 상태로 됨)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는 누구든 파문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금서 목록이 작성되고, 종교재판소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다.
가톨릭교회가 빠르게 제자리를 잡는 데는 예수회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1540년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교단은 학식과 절제, 그리고 사명감을 지니고 교회 혁신에 앞장섰다. 예수회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의 군대’라 불리는 수도회이다. 에스파냐의 젊은 귀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1491~1556)는 팜플로나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그는 병상에서 삶과 종교에 관해 성찰했다. 그리고 교회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 투사가 되기로 했다. 비유럽 세계의 선교 활동에 나섰으며, 어린이와 문맹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이 옳다’는 믿음을 주는 예술 행위를 인정했다. 그러나 기존의 미술로는 교회의 의지에 부응할 수 없었다. 새로운 양식이 필요했다. 17세기 초 로마에서 바로크 미술이 탄생했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미술 양식이다. 문맹의 신자를 돕는 소박한 역할에서 벗어나 식자층이나 비신자를 향한 적극적인 교화 수단이 되었다. 때맞춰 상대적으로 힘이 강력해진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속세의 절대왕정도 자신의 위엄을 드러낼 새로운 양식이 필요했다. 군주의 권력과 영광에 빛을 집중시켜 충성을 강요할 수 있는 선전도구로 작동하는 그런 미술이다.
당시 마니에리스모의 형체 변형은 대중에게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화려한 장식성과 역동성을 강조한 남성적 미술이면서도 동시에 보는 이의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미술, 바로크가 교회와 군주의 희망을 형상화할 수 있다고 자처했다. 바로크(Baroque)라는 개념은 19세기 스위스의 미술사가 야콥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개념이 잡혔다.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 불규칙한)에서 유래했으며, '고르지 못한 진주'를 가리킨다. 질서보다는 차이가 강조되며, 억제되지 않은 ‘욕망’과 의도적인 ‘비정형성’이 특징이다. 따라서 완벽성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드라마틱한 극적 요소가 중요했다.
예수회에서는 새로운 예술에 왕성한 후원을 하였는데, 실제 인물의 진정한 신앙을 극화처럼 보여줌으로써 신자들을 교화하려 했다. 그래서 바로크 양식을 일러 예수회 양식이라고도 불렸다. 예를 들어 루벤스의 <성 리비누스의 순교>를 보면, 그 이해가 쉽다. 작품 속 빨간 모자를 쓴 사내가 개에게 붉은 살점을 주고 있다. 벨기에 겐트의 주교로 있던 성 리비누스의 혀다. 그는 아일랜드인으로 이교도들에 의해 혀와 머리가 잘려 죽었다. 순교가 있은 지 천 년이 지나 겐트의 예수회 의뢰로 작품을 완성했다.
루벤스는 화폭을 이등분했다. 아래에는 형리 중 한 명이 피가 묻은 칼을 입에 물고, 왼쪽 인물이 성자의 수염을 잡고 있다. 매우 폭력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위는 아기 천사가 성자에게 승리와 부활을 의미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주고, 다른 천사는 형리들을 번개로 벌하는 장면이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겪는 일인 양 착각을 일으킨다.
바로크는 1600~1750년 사이 유행한 양식적 표현이다. 모든 면에서 르네상스 양식과 대비를 이룬다. 르네상스가 이성의 완결성을 추구했다면, 바로크는 인간 감성의 역동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건축이 앞장을 섰다. 그중 바로크 최초의 건축 양식은 로마에 있는 <일 제수(Il Gesù) 성당>이다. (토마스 R. 호프만, <바로크>) 이제부터 설명하는 성당은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종교적인 장소가 아니다. 장인과 작가들의 노력으로 수 세기에 걸쳐 완성한 창작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회의 창시자인 로욜라의 성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세워졌으니 반종교개혁의 이상을 보여주는 데 손색이 없었다. 미켈란젤로 사후 로마의 지도적인 건축가 자코모 다 비뇰라(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573)가 설계했다. 사제와 신도가 공동체라는 감정이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성당 내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도록 하고, 많은 미사가 동시에 올려져야 했기에 넓고 개방적이어야 했다. 가로, 세로가 같은 크기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에서 세로가 긴 라틴십자가 형태로 실내공간이 이루어진 반종교개혁 건축의 전범(典範)이었다. 성당 전면 파사드는 미켈란젤로의 제자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1540?~1602)가 비뇰라 사후 설계를 변경하여 바로크식으로 완성했다.
‘바로크 교황’이라 불리는 식스투스 5세 때 로마의 도시계획이 이루어졌다. 베드로 성당도 라틴십자가 형태로 바뀌었으며, 힘과 승리의 상징 오벨리스크를 성당 앞 타원형 광장 중심으로 옮겨왔다. 1623년부터 교황 우르바노 8세를 필두로 교황 일곱 명의 총애를 받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가 건축, 조각, 장식 등 바로크 예술 전반을 이끌었다. 같은 세대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보다 한 살 위였다.
성당 내 <닫집(발다키노, 교황의 제단으로 높이 29m, 무게 37t의 청동 조각>이 압권이다. 교황령 총수입의 1/10을 들여 제작한 것으로 특히 나선 모양 기둥이 운동감을 부여한다. 라파엘로와 루벤스 회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드로 성당 앞 <타원형 광장과 열주> 역시 바로크 건축의 전형이다. 열주 위 성자들의 조각을 3.13m 높이로 제작한 데 반해 멀리 보이는 파사드의 인물상은 5.82m 높이로 제작하여 같은 크기로 보이는 착시효과를 창출했다. 이외에도 유명한 <트레비 분수(1732~1762)>가 베르니니의 원안(原案)에 따라 완성했다.
그는 조각에서도 바로크의 특성을 잘 드러냈다. 스물네 살에 완성한 초기 작품 <플루톤과 페르세포네(1621~1622)>는 신체적 운동감이 극적이다.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흉상(1632)>을 통해 실물과 가까운 새로운 유형의 초상조각의 시대를 열었다.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안 <무아경의 성 테레사(1647~1652)>와 <다비드(1623)>가 대표적이다. 그의 <다비드>는 미켈란젤로처럼 물맷돌로 돌을 던지기 직전 모습을 택했다. 그러나 몸을 뒤로 힘껏 젖혀 뒤틀린 몸의 근육 선에서 강렬한 역동성과 긴박성이 뚜렷하다. 르네상스 미술의 완벽성에 비해 비정형적 형태에서 발생하는 ‘불안정’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점이 바로크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독창성이기도 하다.
베르니니의 이야기를 끝내면서 그의 라이벌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ni, 1599~1667)의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석수에서 출발하여 우직하게 건축 한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동시대에 태어난 두 사람은 음악에 있어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와 흡사하다. 벨라스케스가 초상화를 그려 유명한 인노첸시오 교황 때 베르니니를 몰아내고 수석 건축가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다. 완벽한 조화, 디테일과 함께 동적인 흐름이 있는 <산 카를로 성당>을 건축했다. 로마 바로크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그러나 베르니니에 대한 극심한 피해 의식에 시달렸으며, 끝내 단단히 고정한 칼날 위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
절대군주를 위한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베르사유 궁전>이다. 1661년 태양왕 루이 14세가 플롱드 난(1648~1653)이 끝난 후 자신을 지켜준 재정총감 푸케의 세력이 커지자 ‘비리와 반역’ 혐의로 축출했다. 그리고 샤를 르 브룅을 불렀다. 스승 푸생이 루이 13세의 화가라면, 르 브룅은 루이 14세의 수석 궁정화가다. 건축가 루이 르 보와 조경사 앙드레 르 노트르를 함께 부른 루이는 이렇게 명령했다.
“(세 사람이 지은) 푸케의 보 르 비콩트 성을 뛰어넘는 궁전을 지어라.”
베르사유 궁전은 외형상 거대한 외관을 지녔다. 루이 14세가 기본적으로 '호화로움을 넘어 장대함에 이르는 건축물을 짓고자 했기 때문이다. 2,000명의 귀족과 18,000명이 넘는 근위대 병사와 시종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굳이 바로크 양식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전주의의 덕목인 절제, 단순화를 지향했다. 따라서 궁은 곡선이 배제되고 직선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내부 장식에 로코코 양식이 대거 도입되었다.
1661년에 시작되어 50년 동안 궁전의 개축이 이루어졌다. 중심 테마는 루이의 이미지에 맞는 ‘태양의 신 아폴론’이다. 앙드레 르 노트르가 설계한 정원은 직사각형의 중심부 건물을 양쪽 날개로 감싸도록 설계했다. 그 폭이 580m에 이른다. 루이 15세 때 궁전에 오페라하우스를 추가했으며, 이곳에서 1770년 세자와 마리 앙투아네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르브룅이 기획하고 쥘 아르두앵-망사르가 만든 <거울의 방>이 유명하다.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 사이에 17개의 창문이 정원 쪽으로 향한 73m 길이의 거울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한편 1648년 30년 전쟁에서 패한 후 50년 가까이 지나 오스트리아 빈의 서남부에 있는 쇤브룬 앞의 구릉 지대에 거대한 궁전이 세워졌다. 합스부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n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1656~1723)에게 설계를 위임했다. 베르니니에게서 배운 그는 황제의 권위를 위해 ‘베르사유를 넘어서는’ 성을 짓고자 했다. 그는 바로크 건축 양식의 마지막 <카를 성당>도 지었다. 빈에 지은 타원형 성당 정면에 나선형 원주 기둥이 매혹적이다. 솔로몬 신전의 두 개의 청동 기둥, 야킨(Jachin)과 보아스(Boas)처럼 ‘의연함과 용기’를 표현했다. 제2의 성 베드로 성당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