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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07. 2022

프랑스 낭만주의와 제리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고대 불어 ‘로망(roman)’에서 파생한 '낭만적'이라는 개념에는 '소설과 같은', '시적이며 환상적인', 또는 '꿈꾸는 듯한, 비현실적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유럽에서 풍미한 낭만주의 운동은 개념이 다르다. 인간의 감정, 정서와 관련된 모든 정념을 믿었다. 이 점에서 이성의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존 허스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19세기 전반 천재적인 작가를 많이 배출했던 프랑스 문학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루소의 ‘감성’에 의지한 낭만주의 운동은 지도자 빅토르 위고가 망명을 떠남으로써 쇠퇴했다. 위고는 1851년 루이 나폴레옹의 제정 치하에서 반정부 인사로 낙인찍혀 벨기에로 피신했다. 그는 망명 중 대작 <레 미제라블>을 완성했다. 

회화에서 낭만주의 역시 당시 주류였던 이성의 신고전주의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문학의 비현실적인 요소를 추출하면서 규범으로부터 자유를 지향했다. 따라서 특정한 화풍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새롭게 색채를 중시하고 자연의 초월적인 숭고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낭만주의 화가는 개인의 주관적 감정 표현을 새로운 창조성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대혁명 이후 혼란한 국내 정치 상황 속에서 싹튼 저항정신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며, 이국적 주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돌격하는 기병 장교(1812)>와 <부상당한 흉갑 기병(1814)>

출발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였다. 루벤스의 바로크적 역동성에 열광했던 그는 위대한 역사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는 캔버스에 담을 만한 화려하고 위대한 서사가 없었다. 초기 작품 <돌격하는 기병 장교>가 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제국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를 확인해주듯 <부상당한 흉갑 기병>을 그렸고, 엘바섬에서 빠져나온 나폴레옹은 이듬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몰락했다. 

제리코의 대표작은 역시 낭만주의의 선두주자로서 명성을 쌓게 해 준 <메두사호의 뗏목(1817~1820)>이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더불어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한다. 이곳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공부했던 제리코로서는 사뭇 흐뭇했을 일이다. 안타까운 점은 12년이란 짧은 활동 기간 중 단 세 번만 살롱전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출품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로마에 머물 때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에 매료되었던 제리코는 귀국하여 메두사호의 비극을 접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 패하여 완전히 몰락한 후 루이 18세가 파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 ‘빈 회의’를 개최한 유럽의 지도자들이 부르봉 왕가를 부활시켜 그를 새로운 왕으로 앉힌 덕분이었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제리코는 1년 넘게 가로 7m, 세로 5m의 대작을 준비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청취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모습과 사형수의 잘린 몸의 색채 변화를 스케치했다. 그리고 최종 완성작에는 아르귀스호를 향해 삶을 열망하는 극적인 순간, 혼혈인이 손을 내뻗어 흔드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두 개의 피라미드 구도를 완성했다.


<메두사호의 뗏목(1817~1820)>

1816년 7월 2일 새롭게 식민지가 된 아프리카 세네갈을 개척하기 위해 4척의 함선이 프랑스 남부 엑스항을 출항했다. 하지만 생루이를 향하던 메두사호는 대서양 모리타니 연안으로부터 160km 떨어진 저지대 킵 블랑크 근처에서 암초에 걸려 침몰했다. 당시 함장 드 쇼마레(샹보르) 백작은 왕년의 해군 대위였으나 25년 전 혁명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쳤기에 항해 경력이 없었다. 왕정복고로 돌아온 그는 신분과 돈을 앞세워 해군 중령의 지위를 얻었으며, 사령선 메두사호의 함장 자리를 원했다. 그러나 얕은 항해 지식보다 부도덕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승선자 수는 도합 245명, 구명정이 부족했다. 배의 잔해로 만든 20m×7m짜리 뗏목을 급조하여 연결했다. 함장은 자신에 편에 선 장교와 노련한 선원들, 그리고 세네갈 총독 슈말츠 등 고위 관료와 그 가족을 우선했다. 88명을 안전한 6개의 구명정에, 나머지 157명은 구명정이 끄는 커다란 뗏목에 나누어 태웠다. 뗏목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도 가뜩 실렸다. 발목까지 물에 찼고, 차오른 만큼 뗏목은 물에 가라앉았다. 구명정에서 힘겹게 노를 저어나가는 사람들도 불만이었다. 결국, 함장은 뗏목을 연결한 밧줄을 끊어 버리기로 했다. 

함장과 그의 동료들을 태운 구명정은 나흘 뒤에 무사히 세네갈 해안에 당도했다. 그러나 조난자를 태운 뗏목은 표류했다. 첫 날 뗏목 가장자리에 있던 30여 명이 파도에 쓸려갔으며, 이튿날 식량을 서로 차지하려고 유혈사태를 벌여 60여 명이 살해되었다. 무려 13일간 뗏목에서 사투를 벌였다. 사람들은 바다에 빠져 익사하거나 갈증과 주림으로 죽어갔다. 끈이 풀려 다시 뗏목이 떨어져 나가자 중앙 자리를 차지하려고 폭력이 난무했다. 먹을 것, 마실 것이 떨어지고 생존자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를 찾는 광기와 공포로 가득했다. 

 

7월 17일에야 아르귀스호가 15명의 조난자를 발견했다. 역설적인 것은 아르귀스호가 드 쇼마레 함장이 뗏목에 남겨 둔 9만 프랑 어치 금화가 담긴 세 통을 찾기 위한 범선이었다. 생존자가 없을 줄 알았던 것이다. 생존자 15명 중 5명은 구조된 그날 4명, 수일 뒤 1명이 숨졌고, 10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의 증언이 신문을 통해 공개되었다. 뻔뻔했던 드 쇼마레는 지위 박탈과 함께 재판을 받고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오히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행동에 역겨움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습작, 원작의 피라미드 구조와 대조를 보인다

제리코는 당시 신문에 게재된 선상 일기의 주인공 의사 앙리 사비니를 비롯해 두 명이 오히려 식인 혐의로 고발되자, 분노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르귀스호와 처음 조우했던 극적인 장면에 초점을 맞췄다. 뗏목 위 높은 쪽은 살아 있는 이들이, 가장자리 낮은 쪽에는 죽은 이들로 갈랐다. 피부의 색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그중 바닷물에 머리가 잠긴 채 널브러진 오른편 시체가 가장 처참하다.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체념한 모습이 역력하다. 왼편 수염 기른 남자는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망연자실한다. 두 개의 피라미드 무리 중 목말 탄 채 헌 옷을 흔들고 있는 인물만이 실낱같은 희망을 나타낸다. 그러나 멀리 아르귀스호는 잘 보이지 않는다. 

1819년 제리코는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난파선이 있는 장면>이라는 애매한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메두사호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단순한 선박 사고로 여기지 않았다. 루이 18세와 후임자 샤를 10세 정부의 무책임하고 무능한 지도자들로 인해 표류하는 프랑스의 정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 사건의 과정과 인원수 등이 많이 엇갈린다. 다행히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제3 인류> 2권에서 얻은 자료로 재구성했다. 프랑스 작가이니 사실에 근거했으리라 믿으며.

아리 셰페르, <제리코의 죽음>

작품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노력과 달리 “독수리의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린 형편없는 그림”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때 영국 흥행사의 제의로 런던, 더블린에서 입장권을 받고 전시했는데, 무려 5만 명이 몰려드는 선풍을 일으켰다.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정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1820년부터 1822년까지 영국에서 지냈다. 이때 런던과 더블린 등을 순회하면서 비로소 작품이 정당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위로를 받은 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초상화 연작을 그렸다. 하지만 제리코는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뗏목 위 열다섯 명 중 누구도 비쩍 마른 모습이 아니다. 신화적인 비장미를 강조했다. 그리고 새롭고 획기적인 주제를 찾지 못했다. 결국, 무모하고도 자학적인 성향이었던 그가 야생마를 길들이는 일에 몰입했는데, 연 이은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쳤다. 그리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의 죽음은 동료 낭만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미화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아리 셰페르(Ary Scheffer, 1795~1858)가 1824년에 살롱전에 출품한 <제리코의 죽음>이다. 제리코가 좋아하던 스케치와 그림들이 벽에 둘러싸인 가운데 친구들의 그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고 있다. 하얀 옷을 입은 주검은 마치 예수처럼 예술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의 모습이다. 이후 프랑스 낭만주의 양식은 피에르 나르시스 게링의 화실에서 함께 그림을 배웠던 들라크루아가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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