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의 등장인물을 참조하여 지옥에 떨어진 <단테의 배>를 그렸다. 강렬한 색채와 지옥의 강에서 격렬하게 요동치는 인물이 특징적이다. 이 최초의 걸작이 탄생할 때 에게 해의 터키 접경에 있는 그리스 섬 키오스에서 엄청난 학살이 저질러졌다. 1822년 오스만 튀르크 군이 그리스 독립운동의 기세를 꺾으려 원주민 약 900여 명만 남기고 대부분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10~15만 명이 죽고 5만여 명이 끌려갔다고 하지만, 전체 주민이 9만 명 정도였다고 하는 등 수치상 의문이 생긴다)
그러자 유럽 문명의 뿌리라는 연대감이 작용한 듯 당시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들의 관심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 독립전쟁에 집중했다. 들라크루아도 이국적 배경에다가 스케일이 큰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때마침 서구 사회는 ‘엘긴 마블스’로 인한 그리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일어났고,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영국 시인 바이런이 이 전쟁에 참여하여 사망함으로써 관심이 증폭되었다. 바이런에게서 오리엔트의 모티브를 끄집어냈던 들라크루아 역시 그리스 독립전쟁을 주제로 작품에 임했다. 이전의 화가들은 극적인 전투 장면이나 국가의 승리를 담았으나 그는 권위에 맞서 싸우다 실패한 희생자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렇게 낭만주의의 감수성이 극명하게 나타난 작품이 바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이다.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서 ‘두 개의 삼각형이 겹치는 구도’를 차용했다. 이 구도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반인륜적인 사건 속에서도 인간 실존에 대한 희망을 간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역사에 접근함에 있어 형평성이 부족했다. 그리스나 바이런은 물론 그리스 독립을 지원한 영국, 러시아에게도 이중성이 존재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29)은 벨기에, 폴란드, 이탈리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다른 피지배 민족의 독립정신을 자극했다. 그러나 국가적 이해에 급급했던 영국과 러시아의 지원은 "프랑스 혁명 정신과 민족주의 확산을 방지하겠다"는 '빈 회의(1814~1815)' 합의에 위배된다. 이듬해 서유럽에서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이탈리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는데 프랑스와 벨기에만이 성공했다. 벨기에는 183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독립 과정에서 그리스 혁명군이 아티키나 펠로폰니소스에서 튀르크인, 무슬림,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한 사실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바이런의 참전도 이상적인 신념과 함께 방탕한 사생활로부터 탈출구 역할을 했다. 많이 봐주어서 낭만적인 죽음이었다. 그래서 작품이 주는 혁신과 장엄성에도 불구하고, ‘유럽인의 시선에서 그렸다’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후에도 상징적인 작품 <메솔롱기온 폐허 위의 그리스(1826)>와 극단적인 오리엔탈리즘을 표현한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 제목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들라크루아에게 모로코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1832년 에스파냐와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보낸 5개월이 그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자료에 근거한 사실적 표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태양이 강렬한 이곳에선 많은 화가가 저절로 색채에 매료되는 일이 빈번했다. 훗날 <알제의 여인(1834)>을 그린 피카소와 튀니지에서 새롭게 태어난 파울 클레가 이를 웅변한다. 들라크루아는 데생 위주의 고전주의에 대한 경멸이 깊어졌다. 결국, 십자군 전쟁에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약탈한 제4차 전쟁을 모티브로 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1840)>을 그리면서 색채 화가로 변모한다. 동양과 서양의 대립, 진보와 야만의 개념이 혼란스러웠던 그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런 그의 변화는 우리가 단단하게 무장했다고 여긴 가치관이 얼마나 부실할 수 있는지를 증거한다.
들라크루아가 당시 화단의 거물이었던 신고전주의 앵그르와 견줄 수 있는 명성을 갖게 되는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이다. 낭만주의 회화의 선언적 의미를 지녔다. 그의 그림은 '선 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는 기존 회화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강렬한 색채와 동작을 표현하는 새로운 회화의 시대를 예고했다. 하지만 순수예술에 경사되었던 앵그르 중심의 신고전주의 화가들은 ‘품위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화단에는 그와 당시 거물이었던 앵그르를 묶어 선과 색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들라크루아는 선 중심의 고전주의 양식에 대해 '고대의 환상'을 좇는 생동감이 결여된 캐리커처라고 비판했다. 과거의 미술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감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색이야말로 화가의 상상력을 키운다고 여겼다. 당연히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화가는 들라크루아였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국민군에 입대했지만, 실제로 봉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명망이 높은 외교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정치적으로 오히려 보수주의자였다. 그런데도 혁명가로 비추는 것은 이 그림 때문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유일하게 프랑스의 정치 상황에 개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혁명, 반혁명의 소용돌이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왕정복고를 통해 권력을 잡은 루이 18세에 이어 막내 동생 샤를 10세가 즉위했다. 그는 입헌정치를 인정하지 않고 보수반동의 강압적인 정책을 펼치며 프랑스를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리려 했다. 분개한 파리 시민이 이에 맞서 그리스가 독립한 이듬해 7월 혁명을 일으켰다.
작품은 그 ‘영광의 3일(7.27~29)’ 중 7월 28일 다양한 계급이 들고 일어선 현장을 기록했다. 실크 모자를 쓰고 구식 소총을 들고 있는 인물은 들라크루아 자신이라기도 하고, 공화당원 에티엔 아라고라고도 한다. 작품은 사건의 사실적 표현이 아니다. 알레고리가 담겨 있다. 그중 중앙에서 군중을 이끄는 여성 마리안(Marianne)으로 인해 작품을 낭만주의 회화로 특징짓는다. 어두운 톤의 색조에서 밝게 빛나는 색채 대비를 통해 여신의 숭고함을 강조했다. 해방된 노예를 상징하는 '혁명의 모자' 프리지언 캡을 눌러쓴 그녀는 가슴을 드러낸 채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삼색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대표하며, 3개의 신분을 상징한다. 왼손에는 무거워 보이는 장총을 거뜬히 쥐고 있으며, '보편적 자유의 이상'이자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건강하고 힘찬 여성상을 상징했다.
혁명은 샤를 10세를 퇴위시키고, '평등한 자의 아들', '시민 왕'이라고 불리는 루이 필리프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메두사의 뗏목>처럼 이 작품도 1831년 살롱전에 출품된 이후 환영받지 못했다. 루이 정부가 비싼 값에 사서 최초 뤽상부르 궁전에 전시하였다. 그런데 불안감을 느꼈는지 1년 6개월 만에 철거하여 미술품 창고에 넣어둔 채 오랫동안 대중과 떼어 놓았기 때문이다. 언론과 전시 검열제도를 도입한 정부는 혁명의 열정이 절제된 표현을 희망했다.
대신 나폴레옹을 위대한 순교자로 받들었다. 미완성이던 <나폴레옹 개선문>과 프랑수아 뤼드(François Rude, 1784~1855)의 거대한 조각 작품 <영생을 깨닫는 나폴레옹(1846)>을 제작했다. 사실 다비드의 작품과 비교되어서 그렇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의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도 풍자적인 작품이 아니다. 영웅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인물을 인간적인 모습으로 접근했을 뿐이다. (데이비드 블레이니 브라운, <낭만주의>) 따라서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은 루이가 혁명으로 퇴위한 1848년에야 다시 대중의 곁으로 강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