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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14. 2022

독일 낭만주의자 프리드리히

<산중의 십자가(1808)>

윌리엄 터너가 격정적이라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독일인의 정서와 애국심을 잘 대변했다. 그는 아카데미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평론가를 혐오했으며,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 몰입했다. 풍경화가인 그가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수가 됨으로써 '수준 낮은', 심지어 ‘고급 벽지’로 평가받던 독일 풍경화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그가 처음 주목을 받은 작품은 <산중의 십자가>다. 자연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 풍경에, 전나무보다 초라해 보이는 십자가를 바위산 위에 배치했다. 강력한 종교적 상징을 입힌 풍경화다. 하지만 당시 풍경화는 최하의 장르였다. 드레스덴의 예술비평가 람 도어로부터 “풍경화가 교회에 숨어들어 제단 위로 슬그머니 올라간 것”이라며 신성모독이라고 격렬히 비판을 받았다. (이유리, <화가의 출세작>) 


곧이어 자신의 작품 구성상 특징이 잘 드러나는 <바닷가의 수도사>를 그렸다. 발틱 해변이다. 전경이 없어 낯설다. 가까운 인물과 멀리 보이는 원경, 크게 둘로 나뉘었다. 주제와 연관이 없는 풍경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화폭의 반 이상을 빈 곳으로 남겨두는 대신 풍경에 감정을 실었다. 멀리 이상(理想)을 꿈꾸듯 적막하고 고독하며, 신비롭다. 보는 이는 저절로 수도사에 동화되어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그의 주제인 ‘하나님과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하찮음’이다. 그럼, 불안스레 다가오는 먹구름이 죽음이라면, 그 위 밝은 하늘은 부활의 희망일까?

<바닷가의 수도사(1809~1810)>

그의 작품에는 어릴 때 겪었던 불행한 개인사가 스며 있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포어포메른 주의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자식 열 명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1781년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일 년 뒤 누이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열세 살이 되어서는 물에 빠진 그를 구하려다 형 요한 크리스토퍼가 빙판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 열일곱 살에는 누이 마리아가 병으로 죽었다. 엄격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영향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통해서 삶의 허무함, 그리고 주변 자연에서 발견되는 절대적 숭고함에 관한 깊은 성찰이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1818)>

그의 작품 중 ‘숭고’를 담은 최고의 풍경화로 꼽히는 작품이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1818)>다. 작센과 뵈멘 지방의 여러 장소를 합성했는데, 발아래 안개 바다(雲海)가 엘베강의 수원(水源)을 이루는 계곡을 감춘다. 안개는 자연을 실제보다 더 거대하게, 더 장엄하게 보여준다. 계곡 너며 아래쪽 산봉우리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들이 눈에 띈다. 위대한 생명력이다. 그 뒤 원경은 텅 비었고, 작품 속 인물과 눈높이가 같아 더 멀고 아련하다. 부재(不在)와 침묵을 그리고 싶었을까? 주변과 대화를 차단한 그야말로 몰입이자, 무한(無限) 혹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이다.

풍경 속 인물은 제법 비중 있게 담았지만, 그 역할이 모호하다. 발도 딛기 어려운 정상에서 대자연을 마주한 채 혼자 서 있다. 그것도 뒷모습이다. 익명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하지만, 때론 불편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깨와 등, 그리고 다른 것들을 통해 그 심리를 대신 읽을 수밖에 없다. 일단 당당하다. 험준한 대자연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주인공이 프리드리히 자신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작센 보병대 장교 콜로넬 프리드리히 고타드 폰 브링켄이라고 말한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그러나 누구인가 보다는 입은 옷이 중요할 수 있다. 1817년 예나 대학생 11명이 결성한 애국단체 '부르셴사프트' 단복이라고도 말한다. 실제 1806년부터 1814년까지 작업실에서 지식인을 모아 반(反)프랑스 모임을 갖기도 했던 프리드리히가 중년 때부터 추구했던 민족주의와 자연주의를 반영했다. 따라서 남자의 뒷모습에서 프랑스에게 점령당한 조국의 부당한 현실을 걱정하는 작가의 저항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 


리젠게비르게의 아침(1810~1811)과 리젠게비르게(1930~1935)

그는 프러시아 황태자가 그의 작품 <참나무 밑의 수도원>과 <해변가의 수도승>을 구입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이 조국에서 물러나고, 1816년에는 연금을 받는 드레스덴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작품이 완성되는 그해 1월에는 가정을 꾸렸다. 마흔네 살에 맞이한 스물다섯 살 신부 카롤린 봄메르(Christiane Caroline Bommer)는 물감 제조업자의 딸이었다. 이때의 달뜬 감정은 <백악(白堊)의 절벽(1818~1819)>에 잘 드러났다.

이렇게 안정을 찾아가자 그의 풍경에는 밝은 색상과 애국적인 기운이 나타나고 상징성은 오히 축소되었다. 친구 케르스팅과 함께 여행했던 <리젠게비르게의 아침>과 달리 <리젠게비르게>에서는 십자가와 흰옷의 소녀가 생략된 점이 그 방증이다. 지나치게 진지해서 그랬을까? 1835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는 유화를 포기한 채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1840년 사망했다. 작가의 인생도 자기 그림을 닮아가는 걸까? 무상(無常)하다. (제목 그림은 프리드리히가 아내 카롤린을 그린 <창가의 여인(1822)>이다)

헨리 푸젤리의 <악몽(1781)>

여기서 잠깐 스위스 출신 영국 낭만주의 화가 헨리 푸젤리(Henri Fuseli, 1741~1825)의 <악몽>을 소개하고 낭만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겠다. 2013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개최한 ‘검은 낭만주의(Dark romanticism)’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이다. 검다는 것은 낭만주의의 또 다른 면, 즉 어두운 감성을 담았다는 뜻이다. 작품 세계가 매우 독특하여 20세기 초현실주의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의 동시대 화가 고야의 작품에 비하면, 섬뜩하지 않다. 체험이 동반되지 않아서 그랬을까? 다만, 그동안 신과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동경과 고독의 감성을 담은 낭만주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는 정도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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