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초만 해도 유럽 국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로 인해 사회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 식민지로부터 값싼 곡물과 원자재가 공급되자 농촌은 유휴 인력이 남아돌았고, 도시에는 1760~1840년 사이 기계 설비를 갖춘 큰 공장이 들어섰다. 자본가들은 수공업적인 작업 환경을 개선한 데 만족하지 않았다. 단가를 줄이기 위해 공장을 증설하고, 농민을 도시로 불러들여 공간을 채웠다. 도시가 팽창했다. 독일의 경우, 1840년 인구 10만 이상 도시가 함부르크와 베를린 두 곳이었으나 1910년경에는 48개로 늘었다. (이원복, <새 먼 나라 이웃 나라(프랑스 편)>)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의 유럽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대량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그러자 식민지의 구매력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원료를 수탈당해 생산력을 잃은 그들의 처지에서는 구매력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박리다매(薄利多賣), 유럽은 저가의 완성품을 생산했다. 결국, 노동자의 임금이 저당 잡혔다. 한때 농민이었던 그들의 단순 노동은 저임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밤새 돌아가는 공장에서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생활이 피폐해지고, 삶은 고단했다. 프랑스에는 1847년부터 10명 이상을 거느리고 있는 공장에서 67만 명의 남성 노동자와 함께 25만 4천 명의 여성과 13만 명의 아동이 일했다. 아니 일해야만 했다. 특히 아동 노동자들의 3/4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가는 형편이었다. 대혁명의 주요 가치 중의 하나인 ‘평등’이 구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낭만주의의 주관성과 감상주의를 배격하고 객관적 진실을 찾는 노력, 즉 사실주의 미술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사실성은 르네상스 시대 이미 북유럽 미술을 규정짓는 특징이다. 얀 반 에이크와 뒤러의 작품이 그랬고, 이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미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 그러나 19세기 프랑스의 사실주의는 단순한 사실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당시 새롭게 시작된 문화 예술 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에도 민중의 삶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혀 발전이 없었다. 소작 농민은 오히려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권리 선언>에서 자연권의 핵심은 재산권이었기에 선거권이 납세 금액에 따라 부여되었다. 유권자 수가 겨우 9만 명이었고,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은 1만 6천 명에 불과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등장한 루이 필리프(재위 1830~1848) 정부에서 검열제도를 실시했다. 상대적으로 캐리커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냉소적인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é Victorin Daumier, 1808~1879)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캐리커처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그는 사회의 부정부패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화가였다.
스물세 살 도미에는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에서 일하다가 정부에 의해 정간된 후 대체 발행되는 '르 샤르바
'의 시사만화가였다. 이곳에서 그는 <가르강튀아>를 그려 유명해졌다. 엄청난 세금 인상에 반발하여 국왕 루이를 살찐 대식가로 묘사했다. 오른편 끝에 젖을 보채는 아이를 안은 여인의 영양실조에 걸린 모습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루이는 당시 1,800만 프랑이 넘는 연봉을 스스로 책정했는데, 이는 나폴레옹보다 37배나 많고, 미국 대통령이 받은 금액의 거의 150배에 가까운 액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왕의 배설물인 이권을 가운데 놓고 다투는 군상(群像)으로 정치인을 표현했다. 매우 압축적이며, 당시의 세태를 통렬하게 풍자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캐리커처가 온전히 수용될 리 만무했다. 그는 1832년 체포되어 벌금과 함께 6개월간 갇혀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주간지는 1834년 폐간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카를 마르크스도 1845년 루이 필리프에게 추방되어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길을 떠났다. 마르크스는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불공평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자본은 자기 증식, 즉 이윤과 잉여가치를 낳은 운동체"라고 규정했다.
도미에가 검열을 피해 석판화 작업을 계속하던 중 1848년 2월에 혁명이 일어났다. 노동자가 중심이 된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물러났다. 직접 혁명에 참여했던 그는 이때 출범한 제2 공화국의 이상을 작품 <공화국>에 투사했다.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을 다시 등장시켰다. 여신의 오른손에 역시 삼색기가 들려 있다. 그러나 ‘혁명의 모자' 프리지언 캡이 아니라 월계수관을 썼다. 승리를 의미하며, 동시에 불멸과 평화를 상징한다. 공화국의 이상은 한 마디로 ‘성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성모자상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공화국의 일원들에게 젖을 빨도록 했다.
그러나 '60년 동안 일어난 모든 봉기를 합한 것보다 더 끔찍한 혁명(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의 언급)'이었음에도 세상은 여전했다. 보통선거가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루이 나폴레옹이 깜짝 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는 1852년 황제로 즉위했다. 반동이었다. 도미에는 다리의 힘이 풀렸다. 만년의 그는 초기 신랄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서민적 서정주의자로 변했다. 사실주의적 시각을 기본으로 하되, 부드러운 호소력이 묻어 나는 작품을 그렸다. 도미에가 좋아하는 신문물, 기차다. 일등, 이등, 삼등칸으로 구분된 객차에서 인간 군상들을 비교, 관찰했다.
이 작품 <삼등 열차>에는 벌써 이름에서 빈곤이 느껴진다. 남편은 함께 하지 못했다.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마치 기도하듯 장바구니 위에 손을 모은 할머니, 잠든 소년. 도미에는 선 몇 개로 노파의 야위고 피곤한 얼굴을 건조하게 묘사했다. 뒤에 남루한 옷을 입고 마주 앉은 승객들 모두 현실에 찌든 모습이다. 다행히 소년의 입가에 나타난 가벼운 미소가 유일한 희망이다. 전체적으로 크게 낯설지 않다. 우리네 ‘60~’70년대 풍경과 흡사하다. (제목 그림은 <일등 열차(1864)>이다)
도미에는 소외계층을 결코 연민으로 대하지 않았다. 지친 일상에도 좌절하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스케치했다. 담담하게. 붓질은 거칠었지만, 그림은 오히려 풀잎처럼 부드러워졌다. ‘민초(民草)’의 삶을 닮았다. 이것을 개인적인 퇴행이라면,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프랑스가 상층 부르주아지 중심의 사회로 재편되는 격랑 속에서 그의 예술적 몸부림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내면의 격렬함을 거둬내고 감성적인 촌촌살인을 담아낸 그의 작품에서 대중은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러나 가난은 깊어 갔고, 눈은 실명 상태에 이르렀다. 친구 카미유 코로가 파리 외곽 발몽두아에 마련해준 집에서 지내면서 적은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죽기 1년 전인 1878년 빅토르 위고의 도움으로 뒤랑 뤼엘에서 열린 생애 첫 개인전이 실패했으며, 이듬해 하늘의 부름에 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