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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pr 21. 2022

쿠르베의 사실주의과 디스토피아

세계 최초의 개인 전시회를 열다

1760년부터 1850년 사이 전개된 영국의 산업 혁명은 풍부한 노동력, 막대한 자본, 유연한 국가정책과 함께 혁신적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기술 혁명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 혁명의 추가 소득으로 보는 게 옳다. 그러나 부(富)의 공평한 재분배란 지구 상에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다. 기계화되어가는 인간에게 부의 욕망은 억제가 불가능한 본능이었을까? 오히려 ‘유토피아(Utopia) 건설’이라는 인위적인 구호 아래 수많은 인류가 희생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지구촌의 1/4을 지배했던 대영제국 빅토리아 시대(1838~1901)의 풍요 뒤 후미진 곳에도 식민지 수탈, 노동자의 임금 착취, 가부장적 사회에서 신음하는 여성이 존재했다. 보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의외로 양호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무너졌을 때조차 ‘헌 양말’ 속에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앙드레 모루아는 증언한다. 1872년 전쟁 배상금 관련 적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자 응모액이 모집액 30억 프랑의 14배에 달한 것이 그 방증이다. 

자고로 부자가 되는 비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를 창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부를 빼앗는 것이다. 후자가 훨씬 쉽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상황이 그랬다. 대륙이 셋(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인 줄 알았던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곳을 ‘신대륙’이라 불렀다. 난센스다. 그곳에도 훌륭한 문화가 있었건만, 탐욕에 눈먼 그들에겐 금과 은, 그리고 향신료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주민을 죽이고 꺼릴 것 없이 그들의 부를 약탈해 갔던 야만의 시대였다.

 

이 무렵 예술가는 이웃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믿는 화가가 있었다. 프랑스 사실주의의 대표 화가로, 천사를 그려 달라는 지인에게 “먼저 천사를 데려오라”고 했던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그랬다. 그는 "소유란 도둑질이나 다름없다"는 신조로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프루동과 친했다. 말년이 되자 혁명의 중심에 몸을 던졌다. 이것이 세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태도와 다른 점이다. 회화 기법에서도 '정제되고,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방식을 택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 사용되던 채색, 즉 질감이 높고 흑색을 많이 쓰는 방식과 유사했다. 하지만 당시 지배층에게는 사실적이라는 덕목 자체가 불편했다. 아니 위험천만하게 여겼다. 그리고 파리의 중산층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벗어나 쾌락을 도피처로 선택했다. 사실주의자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우리네 일상의 모습에 집중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공허했다. 

 

<오르낭의 매장(1849-1850)>

동시대인의 삶에 뿌리를 둔 쿠르베가 <돌을 깨는 사람들(1849)>에 이어 <오르낭의 매장>을 그렸다. 고향 마을 한 장례식에 고인의 친지와 이웃 50명 남짓이 모였다. 시장, 사제, 판사, 부르주아와 함께 노동자, 포도 재배인, 날품팔이꾼, 그리고 개도 보인다. 하지만 몇몇을 제외하곤 사제의 기도에 귀 기울이는 이가 없다. 이 평범한 의식을 가로 6.6m 대형 캔버스에 담았다. 역사적인 인물에게나 어울릴 크기였다. 1540년 알베르티는 <회화론 3서>를 출판하면서 "역사화가 조형미술의 주제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최초로 밝혔다. 그리고 이 역사화의 범주에 성서와 신화, 그리고 세속적인 주제가 포함된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라 19세기까지 미술계는 역사화, 종교화, 초상화, 풍속화 순으로 규범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쿠르베가 이에 저항하여 '현재'를 그렸다. 밀레의 <만종>이 55.5cmⅹ66cm였으니 살롱전 관람객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그것도 아무도 눈여겨볼 사람 없는 그야말로 소시민의 죽음을 소재로 했다. 살롱의 고상한 관객에게는 죽음이란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일 수 있다. 실제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을 두고 "오르낭에 묻힐까 봐 겁먹게 한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범한 대중들에겐 흔히 겪는 일상적인 통과의례일 뿐이다. 쿠르베가 말하고 싶은 공평의 본질도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목욕하는 여인(1853)>

이번에는 <목욕하는 여인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세가 일단 낯설고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펑퍼짐한 엉덩이에 주름살 잡힌 불룩한 배를 가진 중년 여성이 벌거벗었다. 뒷모습이긴 하나 여성의 나체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앵그르의 이상적인 누드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관람하던 나폴레옹 3세가 ‘여체에 대한 모독’이라며 말채찍으로 캔버스를 후려쳤고, 왕후는 그림 속 여인의 등이 ‘말의 엉덩이 같다’고 비유하여 더 유명해졌다. 작가는 반박했다. “내 고향 오르낭의 여인들은 이렇게 생겼다”라고. 그러나 마땅한 교훈도 없고, 그렇다고 아우라가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함은 거꾸로 천박함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다. 이렇게 그는 관능에도 솔직했다.

<잠(1866)>

1866년, 동성애를 소재로 한 <잠>과 여성의 음부가 그대로 노출된 <세계의 기원>을 주저없이 그렸다. 가장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주문했던 파리 주재 터키 대사 칼릴 베이(Khalil-Bey)가 오히려 <세계의 기원>의 외부 노출을 꺼렸다고 한다. 그럼, 외설은 화가의 몫인가? 주문한 사람의 몫인가? 한편 <잠>에서 다른 나체의 여인과 뒤엉켜 사랑을 나눈 조안나 히퍼넌(Joanna Hifferman) 은 그의 정부로, <목욕하는 여인>에서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바로 그 여인이다. 아름다운 빨간 머리의 조안나는 동료 화가 제임스 휘슬러의 정부이기도 했는데 쿠르베는 적어도 과거 전력이나 성적 취향에 크게 개의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롤프 스네이더르 외, <그림 속의 여인 100>)

<화가의 작업실(1855)>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 미술전에서 그의 대표작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작업실>이 거부당했다. 프랑스 정부가 대외적으로 무게를 잡아보려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내린 조치였다. 쿠르베는 박람회장이 마주 보이는 몽테뉴 가(街) 7번지에 천막을 쳤다. ‘사실주의, G. 쿠르베 전’이라는 간판을 걸고 거절당한 작품을 포함, 43점을 전시했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사실주의'로 규정하면서 세계 최초의 개인전을 연 것이다. 만국박람회와 마찬가지로 1프랑을 받았다. 결과는 무참했고,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회화는 대중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유의지를 얻게 되었다. 12년 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마네가 개인전 개최에 동참했다. 쿠르베는 ‘화가로서의 7년 생활이 요약한 알레고리’ <화가의 작업실>를 통해 작가의 현주소를 알렸다. 

이 작품에 등장한 후원자 알프레드 브뤼야스는 <목욕하는 여인>을 샀다. 그는 전작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에도 등장하여 작가의 안녕을 물은 바 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그는 최초의 무정부주의 지도자 피에르 프루동과 친했다. 그런데도 작품에서는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몸 담그고 있는 시대를 솔직히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정직함, 그 자체가 혁명이었던 시대였다.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1853)>

보불 전쟁 이후 왕정복고에 반발하여 1871년 3월 26일 탄생한 혁명 정부 ‘파리 코뮌’에서 그를 원했다. 그해 초 레지옹 도뇌르 십자훈장을 거부했던 쿠르베는 예술가 총연맹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로마의 아카데미와 미술학교와 학사원의 미술부와 살롱에서 수여하는 모든 메달을 폐지했다. 이어 미술장관으로 지명되자 약탈로부터 문화재를 지켜냈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의 이정표가 된 파리 코뮌이 약 70일 만에 단명으로 끝나면서 그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두 달여 지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쿠르베는 재판에 섰다. 뱅돔 광장에 있던 나폴레옹 기념 원기둥 철거의 책임을 그에게 물어 금고 6개월, 500프랑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해 9월 생트 펠라지 교도소에 수감되어 이듬해 3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1873년 재건립 비용 31만 3,091프랑(당시 우리 돈 약 16억 원 정도)이 부과되었고, 재산을 몰수해 갔다. 

쿠르베 개인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기득권층의 두려움이 컸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와 결탁한 지배계급의 기만을 깨닫기 전에 파리 코뮌의 잔재를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쿠르베는 가혹한 처분과 작품 활동 및 신변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1875년 뮌헨, 빈을 거쳐 스위스로 망명했다. 레만호 주변 라 투르 드 페일스에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리며 숨어 지냈다. 1877년 5월, 파리로부터 매년 1,000프랑씩 분납하라는 최종 판결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파리에 남겨 둔 재산과 그림은 모두 경매 처리하였음에도 판매액이 불과 1만 프랑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해 마지막 쉰여덟 살이 끝나는 날에 모든 한과 아쉬움을 내려놓은 채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병명은 지나친 음주로 인한 부종이었다. 그가 지킨 정직성에 대한 대가치곤 그 시련이 지나치게 혹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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