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자가 담은 ‘현실’

사실주의 도미에와 인상주의 피사로의 비교

by 노인영
마네, <막시밀리안의 처형(1868)>

마네는 무정부주의적 사상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에밀 졸라와 같은 진보적인 작가와 어울렸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것도 바다 건너 멀리 멕시코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현장을 담았다. 1867년 6월 19일 황제와 휘하의 두 장군, 미겔 라몬과 토마스 메 지아의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막시밀리안 대공이 멕시코에 도착한 지 만 3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는 오스트리아 해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베네토 총독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특별한 연고도 없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그곳 광산에 눈독을 들여 프랑스 군대를 진출시킨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이루어진 결과다.

그는 자유주의자로, 진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멕시코에서도 토착민들을 위한 나라를 건설코자 했다. 그러나 그의 선의(善意)는 그곳 보수와 자유주의 양쪽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다. 그나마 공화파 군대와 싸워주던 프랑스까지 멕시코에서 발을 뺐다. 프로이센과 갈등이 고조되고 미국이 공식적으로 요청하자 군대를 본국으로 철수시켰다. 그러고 난 후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이 유럽으로 되돌아오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황제답지 못한 태도라 여겼다. 결국, 공화파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너무 순진했다. 군주정 자체를 거부하는 현지인에게 자신은 그저 탐욕스러운 제국주의 세력의 한 사람으로 비쳤을 뿐인데···


신문 기사를 통해 이 사건을 접한 마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작품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구성을 따왔고, 내용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폴레옹 3세를 비판했다. 그러나 고야의 것이 웅변이라면, 마네는 침묵이다. 격정을 다스리면서 담담하게 사건을 화폭에 옮겼다. ‘투명한 무관심’이다. 첫 번째 버전에서 실제 처형에 참여했던 멕시코 군인을 모두 프랑스 군인으로 바꾸어 그렸다. 그런데 총살형에 참여한 병사들에겐 명중시켜야 한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무서운 것은 병사 뒤 맨 오른쪽 프랑스 삼색기를 상징하는 모자와 군복을 입은 하급 간부의 무심한 태도이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기계적으로 총을 장전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을 닮았다. 오히려 담 넘어 멕시코인의 표정이 극적이다. 그림은 3개의 유화 작품과 50여 회 석판화로 제작되었다. 잘려 나간 작품도 있어서 드가가 다시 모아 짜깁기했다. 그러나 이 ‘야만적인’ 작품은 정작 프랑스에서 전시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대중의 시선을 두려워했으리라 추정한다.


사실주의 도미에와 인상주의 피사로의 비교


도미에, <세탁부(1863)>

그러나 인상주의자의 작품에서 마네만큼 직접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반영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까닭이 무엇일까? 그 대강을 이해하기 위해 직전 양식인 사실주의 화가 도미에의 <세탁부>를 먼저 살펴보자.

엄마와 딸,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몸은 천근만근, 힘들게 마지막 계단을 오른다. 엄마의 오른손은 아이를 잡았고, 왼손 옆구리엔 빨랫감이 잔뜩 들려 있다. 이즈음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위해 센 강에 세탁선이 나타났다. 바지선 위에 큰 규모의 목조로 된 집을 지은 세탁선에서는 씻거나 헹구는 작업, 나아가서 건조와 다리미질 작업까지 일괄적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세탁부는 빨래와 다림질하는 19세기 대표적인 여성 노동이었다.

도미에는 모녀를 둘러싼 어둠은 멀리 파리 시내의 밝은 건물과 극명한 대조를 드러냈다. 빈부격차에 의한 그들의 현실을 이야기해 주는 걸까? 마음이 아려 오는 것은 아이가 엄마의 빨랫방망이를 들어주는 모습 때문이다. 비록 어려도 엄마의 피곤함을 체험으로 깨닫고 있다. 엄마는 그런 아이가 대견하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가파른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엄마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래! 가난이 반드시 불행한 일은 아니다. 엄마에게는 이 아이가 희망이자 미래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도미에는 모녀의 얼굴을 뿌옇게 처리했다. ‘익명성’이다. 산업혁명의 시대, 화려한 파리의 뒷골목에는 이렇게 그늘진 일상이 다반사였다.


20년 후 인상파 드가도 같은 제목의 세탁부(La Blanchisseuse), <다림질하는 여인>을 그렸다.

<다림질하는 여인(1884~1886)>

드가는 지루하고 단순한 노동, 즉 다림질하는 현장에서 발견되는 삶의 피곤함을 표현했다. 1876년부터 작업한 연작 중 하나다. 하지만 온종일 반복해야 하는 값싼 노동에 대한 그의 붓질이 가볍기만 하다. 도시 환경보다 신체의 긴장과 이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오히려 피카소가 청색시대 말에 이 작품을 모델로 그린 <다림질하는 여인>이 도시인의 피곤을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에게도 <세탁부>라는 작품이 존재한다. 하지만 체념한 듯 무덤덤한 그녀의 표정에서 육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서글픈 곡절은 은유가 되었다. 따라서 풍자만화가이기도 했던 도미에의 작품이 얼마나 무겁게 현실을 표현했는지 실감케 한다.

피카소 다림질 하는 여인 1904.png
로트레크 세탁부 1884 1888.png
왼편 피카소의 <다림질하는 여인(1904)>과 로트레크의 <세탁부(1886~1887)>
피사로, <빨래 너는 여인(1887)>

이번엔 모녀와 ‘세탁’이라는 모티브가 담긴 인상주의자의 대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빨래 너는 여인(1887)>이다. 그는 덴마크령 서인도제도 생토마에서 부친이 운영하는 잡화점의 점원이었다. 5년간 일과 습작을 병행하다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로 가출했다. 용기를 내서 당시 인기가 없었던 바르비종파의 코로를 찾아다니며 풍경화가로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도시 풍경을 그렸던 모네와 비교하여 옛 프랑스의 전통적 이미지에 몰입했던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피사로다. 그는 일찌감치 세상의 명망을 멀리한 진정한 예술가였다.


“우선 공부해야 할 것은 형태와 명암인데, 이 두 가지 모두는 미술의 진정한 기초이다. 색과 솜씨는 작품에 매력을 덧붙여준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코로의 가르침이다. 자연과 코로를 닮으려 했던 피사로는 금전적으로나, 작품 세계에서나 모두 넉넉했다. 동료들이 아마추어 화가라 평가받는 고갱과 양식이 이질적인 조르주 쇠라를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시켰다. 진보적인 성향의 아카데미 쉬스를 다니면서 모네와 교우했고, 훗날 이곳에서 촌뜨기란 놀림을 받던 폴 세잔에게서 일말의 개성을 알아보고 따뜻하게 챙긴 이도 피사로였다.

당시 그는 4년 동안 실험하던 점묘법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인상주의로 돌아와 있었을 때였다. 하지만 모녀의 사랑을 따뜻하게 감싸주기 위해 공이 많이 드는 점묘법을 선택했다. 파리 코뮌이 끝나고 10년여 만에 세상이 갑자기 좋아졌을 수는 없다. 하지만 카미유의 시선은 노동자로서 어머니가 아니라 평범한 주부로 향했다. 피사로의 많은 작품에서 여인이 빨래하고 너는 모습이 발견된다. 평소 눈 여겨보지 않았던 소시민의 일상이다. 말년에 눈병이 나서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자 비로소 창문 너머 발견한 소소한 행복이다. 노르망디 지역 루앙의 햇빛이 따갑다.

빨래를 너는 엄마의 그림자가 보라와 파랑으로 물들었다. 그림자에서 다양한 색채 중 청색이 가장 두드러진다. 왼편엔 어린 딸이 풀밭에 주저앉았다. 엄마가 빨래를 널다 내려다보며 “얘야, 너무 뜨겁다. 어디 그늘에 앉아 있으렴”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아이는 요지부동, 일하는 엄마를 계속 지켜보려 한다. 아이에게 엄마가 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두려움이다. 세상 전부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햇빛에 물들어 가는 모녀의 모습은 대중에게 울림을 선물한다.

모네의 <석탄하역부(1875)>

구태여 두 작품 중 어느 하나를 꼭 집어 세상을 보는 시선과 관련 이러쿵저러쿵 비난할 문제가 아니다. 특히 유대인을 부모로 둔 피사로는 의외로 확신에 찬 무신론자였고,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에게 경사되어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을 보였다. 점잖고 조용했지만, 누구보다도 당시의 사회 문제를 걱정했다. 따라서 작가로서 피사로의 시선이 도미에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을 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피사로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던 모네를 비롯하여 드가, 심지어 르누아르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자신들이 그린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고 있었다. 다만 밝은 원색을 사용하여 자연을 묘사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나타나는 숙명일 수 있다. 1886년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렸다. 초기 작가가 많이 빠진 가운데 방향을 잃고 ‘불모의 시기(1884~1887)’를 맞은 르누아르 역시 불참했다. (제목 그림은 피사로의 <햇빛 오후, 루앙 에피스리길(189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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