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드가의 ‘흔들리는 우정’

by 노인영
<마네 부부의 초상(1869)>

이상하다. 에드가 드가(Edgar De Gas, 1834~1917)의 <마네 부부의 초상>이 흉측하게 잘려 나갔다. 마네는 1863년 독일 음악에 재능을 보이던 네덜란드 출신 피아니스트인 쉬잔 린호프와 결혼했다. 드가가 마네 집에 갔을 때 그녀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그때의 부부를 캔버스에 담아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마네 부인 쉬잔의 얼굴을 포함하여 그림 위에서 아래로 1/3 정도가 사라졌다. 마네가 도려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림이 어땠길래 마네가 이런 무례를 저질렀을까? 그러고 보니 턱을 손으로 괴고 드가를 쳐다보고 있는 마네의 표정이 뭔가 마뜩잖다.

팡탱 라투르, <배티놀스의 작업실(1870)>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1836~1904)의 <배티놀스의 작업실>을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쿠르베의 제자였던 그가 그린 게르부아 카페 멤버들의 집단 초상화는 마네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 자카리 아스트뤽(마네의 친구이자 문학가, 예술가)을 옆에 앉히고 이젤 앞에서 붓과 팔레트를 든 인물이 마네다. 액자 속에 얼굴이 들어간 인물은 르누아르이고. 에밀 졸라, 에드몽 매트로, 오토 숄더러, 그리고 모네가 함께 했다. 오른편 키 큰 인물은 바지유다. 그림이 완성된 후 보불전쟁에 참전하여 한 달 만에 전사하게 되기에 그 모습이 애잔하다.

마네는 드가보다 두 살 많았다. 두 사람은 성격상 차이를 보였지만, 작품 세계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사실 마네는 살아 있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드가는 1883년 5월 3일 파시 묘지에서 거행한 장례식을 마치면서 "마네는 우리의 생각보다 위대한 사람이었다"라고 일찌감치 규정했다. 어쨌든 뒤늦게 마네의 아틀리에에 들러 찢긴 사실을 알게 된 드가는 화가 나서 그림을 들고 그대로 나와 버렸다. 그리곤 마네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두>를 돌려주었다. 화를 가라앉힌 드가는 나중에 이를 후회했다.

<자두(1878)>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추측이 무성하다. 먼저 나약한 성격의 마네가 그림 속 아내 모습에서 느낀 불쾌감을 그런 식으로 표출했을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드가는 평소 여성의 얼굴을 제대로 그리지 않았다. 불확실하게 대충 처리했다. 그는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많이 담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체 작품의 반이 넘는 60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발레리나의 운동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데생에만 충실했지, 무희들의 표정은 생략했다.

한편 드가는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마네와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았다. 마네의 예술성에 대한 존경이 여전했다는 의미이다. 마네도 마찬가지였다. 인상주의 화가, 아니 당대 화가 중 가장 지성적인 드가의 이론적 체계와 천재성을 인정했다. 드가는 “선을 수없이 많이 그리라”는 앵그르의 충고를 명심하면서도,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배우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모델이 원하는 자세를 물었던 앵그르와는 달리 모델의 친숙한 자세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견해, 즉 마네의 자격지심이 가져온 결과일 수 있다. 마네는 18살 때부터 자신보다 11살 많은 집안의 피아노 선생 수잔과 동거했다. 주변에 이를 숨겼고, 아버지 사후에야 정식 결혼했다. 따라서 아들 레옹은 마네의 동생으로 소개되었고, 수잔은 아버지의 정부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마네를 ‘아버지의 여자를 뺏은 아들’이라며 수군댔다. 이런 이유에서 마네는 여성을 혐오했던 드가가 자기 아내를 ‘더러운 여자’로 여겨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드가가 작심하고 수잔을 그렇게 대할 이유가 없는데.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제목 그림은 마네가 드가와 어울리며 그렸던 <롱샹 경주마들(1867)이다>)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

그러나 드가보다 30여 년 먼저 떠난 마네의 작품에는 미술사적으로 전환점을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죽기 1년 전 혹독한 보행 장애를 겪으면서도 완성한 <폴리 베르제르의 바>가 그중 하나다. 종업원 쉬종(Suzon)이 정면 한가운데서 탁자에 손을 얹은 채 건조한 시선으로 서 있다. 바로 뒤 거울에는 극장식 술집 폴리 베르제르 안의 손님들 빈자리 없이 꽉 찼다. 서커스를 하는지 왼쪽 상단 모서리 부분에 사람 다리 한 쌍이 보인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는 오페라글라스로 공연을 구경하고 여인이 눈에 들어오고, 테이블에 앉은 일행간 음식과 함께 오고 가는 술잔 속에서 떠드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린다.

손님들에게 오늘 하루가 특별한 날일지 모른다. 하지만 일하는 여성에게는 반복되는 노동일뿐이다. 그녀의 시선은 의미 없이 허공에 머무른다. 노동자 여성의 피곤과 고독을 표현한 작품은 마네의 유언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바니타스(vanitas, 라틴어로 죽음의 공허(空虛)함)’를 그렸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질 네레, <에두아르 마네>) 이곳은 19세기 파리에서 유행했던 카페 콩세르(Café Concert) 중 한 곳이다. 19세기 밤 유흥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쉬종에게서 발견되는 팔찌와 초커 목걸이, 그리고 장미에서 <올랭피아>가 연상된다. 어쩌면 그녀가 앞에 진열된 술병처럼 상품화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작품은 '왜곡된 구'도가 유명하다. 노신사와 마주한 쉬종의 뒷모습은 실제 거울에서는 비칠 수 없는 방향에서 묘사되었다. 이중 시선, 즉 시선을 정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처리하는 기법이다. 기억에 의존해 머릿속에 담은 술집 내 이미지를 대담한 방식으로 옮긴 것이다. 원근법과 과학적 관찰을 무시한 이 기법은 파격이었다. 세잔을 비롯한 후기 인상파와 현대 미술로까지 연결하는 가교 구실을 했다. 미셸 푸코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인상주의를 넘어서서 이후 20세기의 현대 회화를 가능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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