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즐거움만 담은 르누아르

by 노인영
<물랭 드 라 갈레트(1876)>

모네와 절친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대표작 <물랭 드 라 갈레트>다. 파리의 변두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방앗간을 개조한 카페와 무도회를 위해 격자식 울타리를 친 정원을 갖췄다. 작품 속 남성들은 댄디 스타일에 부르주아 모자를 썼고, 여성들의 잘록한 허리와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의상이 돋보인다. 사람들은 이제 잔인했던 혁명의 역사를 뒤로한 채 일상을 만끽하는 표정이다. 르누아르는 춤추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민들에게 비추는 햇살과 이에 따라 생긴 그늘을 다양한 색으로 그렸다. 눈부신 색채 화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그의 붓질에 따라 인물의 표정도 각각 달리 보인다.

흔히 인상주의에서 검은색은 모든 색의 부재(不在), 그래서 색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색의 변화를 담는 검정은 ‘색의 여왕’이라고 말했다. (에바 헬러, <색의 유혹>) 반면 하얀색과 관련해서는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색임을 분명히 했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르누아르의 자서전을 펴낸 조르주 리비에트는 자신이 모델로 참여한 이 작품의 상징성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작품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이는 파리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매우 정확하고 값진 기록이다. 르누아르 이전에 누구도 일상에 관한 주제를 이렇게 거대한 캔버스(131x175cm)에 담아내려고 시도하지 못했다.” (이에인 잭젝, <명화의 재발견>)


그는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그림 입히는 일을 시작했다. 가난했음에도 명랑했고, 겸손했으나 엄숙한 이론에 무심했다. 정념이 넘쳤던 그는 노동자의 그늘진 삶보다는 중상류층의 향락적인 소재를 많이 다루었다. 그리고 자신이 탈이념적인 통속 화가임을 인정했다. 훗날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큰아들 장이 아버지에게 “속물적인 그림만 그린다”면서 대들었다. 그러자 르누아르가 대답했다.


“인생 자체가 어두운데, 그림이라도 밝아야지. 그림은 기쁨이 넘치고 활기차야 해. 비극은 누군가가 그리겠지.”


르누아르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1878.png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

그의 양식에 변화가 감지되는 작품은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이다. 작가 정신과 현실적 곤궁이 충돌할 때 탄생한 작품이다. 1878년 제3공화국은 파리 코뮌 이후 새로운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면서 살롱전이 활기를 띠었다. 고민하던 인상주의 작가 중 살롱전에 출품하는 인원이 속출했다. 르누아르도 매력적인 여인을 그린 <핫 초콜릿 잔>으로 입선했다. 이때만 해도 그는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의 작품이라고 자인했으며, 인상주의자로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1876년 르누아르는 졸라의 책을 출판하던 조르주 샤르팡티에를 만났는데, 그의 주문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인상주의적 특성을 양보하고, 후원자의 구미에 맞췄다. 큰 캔버스(154x190cm)를 고전주의 양식으로 꾸몄다. ‘일본 살롱’이라고 불리는 작은 거실 배경에는 일본 그림, 식탁에는 동양 자기와 꽃, 바닥의 고급 양탄자가 화려하다. 소파에서 오른팔을 쭉 뻗은 샤르팡티에 부인이 아이들에게 다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그런데 부인이 보르트제의 긴 검정 드레스를 입었다. 평소의 르누아르라면, 허용하지 않았을 색조다. 실내에서 검정색은 색채의 변화를 빨아들이기만 하는 무채색이다. 따라서 아이들의 푸른색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작가의 장기인 색채의 순발력을 상실했다. 대신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넘치고 가정의 행복감이 물씬 풍기는 우아한 분위기에 집중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50프랑을 감수하고 그림을 그릴 때였음에도 무려 1,000프랑을 받았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살롱전을 거부한 채 사비를 출현하여 전시회를 개최하고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후원자도, 화상도 파산을 걱정했고, 바르비종파 등 사실주의 화가들이 연이어 사망(1874년 밀레, 1875년 코로, 1876년 디아즈, 1877년 쿠르베, 1878년 도비니)함으로써 생전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1878년 오페라가(街) 28번지에서 강행한 인상주의 네 번째 전시회는 작가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그리고 임신 중인 베르트 모리조까지 많은 화가가 불참했다. 드가가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빼자고 주장하여 ‘사실주의, 인상주의 재야 미술가 제4회 단체전”이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비평가 폴 아르망 실베스트르 (Armand Silvestre, 1837-1901)는 관람객에게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인상주의자들의 장례식과 하관식에 초대받았습니다.”


이 와중에 르누아르는 대중적인 성공을 달성했다. 이듬해 살롱에서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이 입선했다. 그것도 한가운데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인상주의 작품을 배격해온 심사위원의 태도로는 뜻밖의 관대함이었다. 모델의 사회적 위신에 힘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마네에게 혹독했던 기자이자 비평가인 쥘-앙투안 카스타냐리도 “기민하고 유능한 붓놀림"과 “살아있는 듯하고 행복한 우아, 매혹적 색채"라며 높이 평가했다. 샤르팡티에는 1879년 창간한 주간지 <라 비 모데른>의 건물에 전시장을 빌려주면서 르누아르의 파스텔 전을 홍보해 주었다. 다른 후원자를 소개했고, 르누아르의 부탁으로 시슬레의 셋집을 구해주었다.


르누아르 보트 위에서의 점심 식사 1880 1881.PNG
르누아르 우산 1881-6.PNG
<선상의 점심식사(1881)>와 <우산(1881~1886)>

이후 몇 년 동안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전시회가 아니라 살롱에서 환대받았다. ‘혁명적인 예술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났고,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 베른발 근처의 와르주몽 저택에 살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1881년에는 훗날 부인이 되는 알린 샤리고와 함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알제리, 베네치아, 특히 로마에서 라파엘로의 엄격한 프레스코화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후 1888년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색채의 리듬감이 경쾌한 장식적 효과를 만들어낸 후기 양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르누아르는 마흔에 만난 연인인 스물두 살의 알린 샤리고가 강아지를 안고 등장하는 <선상의 점심식사>와 인상-고전주의 두 양식이 혼재된 <우산>을 완성했다.


르누아르 잠자는 소녀 1897.png
<목욕하는 여인(1887)>과 <잠자는 소녀(1897)>

그는 누드화에 천착했다. “만일 신이 여성의 가슴을 창조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화가가 되지 않았을 것”(페터 파이스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이라고 했다. <목욕하는 여인>에서 그 진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고대 그리스인이 발견한 완전성과 질서를 여체에 대한 감정과 어떻게 결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타난다. 표정보다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중했으며, 그 아름다움이란 엉덩이가 넓고 풍만한 몸매의 여인이었다. 알린 샤리고(중앙)와 수잔 발라동(왼편과 오른편 여인)의 몸을 실제보다 성숙하고 풍만하게 그렸다. 그러나 형태가 너무 뚜렷해서 특유의 부드러움, 따뜻함이 사라졌다. 이후 <잠자는 소녀(1897)>를 보면, 유혹적인 색채 사용을 비롯하여 윤곽선이 온화해지면서 ‘쓰다듬고 싶은’ 누드화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앉아 목욕하는 여인(1914)>

르누아르는 60여 년간 작품 약 6,000점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던 셈이다. 1898년 발병한 류머티즘성 관절염은 말년에 악화하여 1910년 이후에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게 되었다. 손은 심하게 비틀려 새의 발톱처럼 휘었다.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묶은 후 작업했다. 그래서 후기 인물화는 대부분 심리적인 호소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르누아르의 누드는 진정 고전적이라 할 만큼 당당하다. <앉아 목욕하는 여인>이 대표적으로, 형태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고통 속에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명도 <목욕하는 여인들(1918~1919)>이다. 작품의 모델 앙드레 에슬링(‘데데’)은 르누아르가 죽은 후 아들 장과 결혼했다. 르누아르가 생전에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고는 하나, 부자(父子)가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까지 닮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1919년, 일흔여덟 르누아르가 서른다섯 살 모딜리아니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냐?”고 물었다. 그해는 르누아르가 죽음을 맞이하는 해였다. 그는 덧붙였다.


“여인을 사랑할 때와 같은 기쁨을 지니고서 그림을 그리게! 자네의 그림을 어루만지게나. 오랫동안 어루만져야 하네. 나는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 며칠 동안 여자의 엉덩이를 애무하듯 한다네.” (장 프랑수아 셰뇨, <명작 스캔들>)


그러자 화가 난 모딜리아니는 벌떡 일어나서 “선생님! 저는 엉덩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고는 가버렸다. 르누아르는 떠나는 모딜리아니에게 연민을 느낀 노인은 즈로로프스키에게 자기 작품 하나를 내주며 “그것을 팔아서 재능은 넘치지만, 버릇없는 풋내기 화가를 도와주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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