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선 카유보트

by 노인영
<대패질하는 사람들(1875)>

역사화가 들라로슈는 최초의 사진기 다게레오타이프를 보면서 예언에 가까운 말을 남겼다.


"오늘 이후 회화는 사망했다."


하지만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는 사진으로도 담아내기 어려운 장면을 섬세하게 연출했다. 그의 대표작 <대패질하는 사람들>이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들(1884)>과 같은 유형의 작품이다. 한눈에 그림의 하이라이트가 마루에 비친 햇살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이기에 가능했고, 선박 건조 전문 엔지니어였던 그의 장점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제목 그림은 같은 해에 그린 <대패질 하는 인부들>의 연작이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소실점을 향해 몰려가는 바닥의 선들이 뚜렷하다. 마루의 대패질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강렬하게 대비를 보인다. 공구와 대패질 조각도 공간에 정교하게 배치되었다. 웃옷을 벗은 노동자들에게서 드러난 상체 근육은 마치 그리스 시대 토르소처럼 고전적이다. 파리의 노동자들에게선 발견하기 어려운 육체임에도 도시 노동자의 현장을 최초로 소개한 작품 중 하나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 충격과 논란을 일으키기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파리 코뮌에 관한 충격과 잔상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한 것은 “저속하고 천박한 주제를 담았다”와 “너무 정교해서 부르주아적이다(에밀 졸라)”는 양쪽의 비평이 공존했다는 사실이다. 정작 카유보트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부각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비 오는 날의 거리 풍경(1877)>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던 카유보트는 1874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미혼인 그는 갖고 있는 여러 척의 요트를 즐기며 정원을 가꾸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아르장퇴유에서 모네와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전업 화가로 모습이 바뀌었다. 화가로 살기 위해 아카데믹한 미술 훈련을 받았다. 기존의 틀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담아내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가 인상주의 세 번째 전시회에 출품했던 <비 오는 날의 거리 풍경>처럼 일신된 파리의 모습이 담긴 작품을 원했을지 모른다. 왼쪽 뒤블링 광장이 있고, 그 뒤로 모스쿠 거리가 시작된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제 갈 길로 가는 가운데 전경 남녀는 시선을 오른편으로 돌렸다. 가로등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소실점이 존재하는 원근법을 사용했다. 스냅 사진처럼 찰나를 묘사했으나 선이 뚜렷한 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여 “이름만 인상파일 뿐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플로리안 하이네, <화가의 눈>) 형식 면에서 일리 있는 지적이다.


작품은 앞서 <대패질하는 사람들>, <유럽교(1876)> 등과 함께 새롭게 변신한 파리의 모습을 담았다. 나폴레옹 3세가 추진한 오스망 프로젝트(1853~1870)와 연관이 있다. 1832년부터 1849년까지 콜레라가 휩쓸고 지나갔고, 인구가 밀집한 파리 중심부에서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쓴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y)에 따르면, 1861년 파리에서 남성들의 결혼 연령이 거의 32세 가까웠다고 한다. 1850년에는 21세에서 36세 사이의 남성 중 독신 비율이 60%나 되었는데, 이런 현상의 주원인은 주거 문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채린, <세 번째 세계>) 비혼과 임대료 상승 문제는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과 유사하다.

슬럼 19,722채의 건물을 부수고 43,777채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좁은 길을 대로로 바꾸었고, 양편으로 인상적인 건물과 기념물을 이어지었다. 놀라운 변화는 도시에 4,500에이커에 이르는 공원을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지하 터널로 새로운 하수도, 상수도 체계를 정비하여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했다. 지붕이 덮인 쇼핑 아케이드와 '봉 마르셰'를 비롯한 백화점(그랑 마가쟁)이 탄생하면서 할인 판매와 반품 정책을 선보여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극대화했다.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변화된 도시에서 받은 영감을 화폭에 옮겼다. 하지만, 개발의 이면에는 그림자가 생기는 법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다. 화가들은 중상류층의 화려함을 그림에 담았지만, 스스로는 가난을 버거워했다. 그래서 새롭게 떠오른 곳이 달동네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그들은 새롭게 둥지를 튼 그곳 카페에 모여 싸구려 압생트를 마시며 격정적으로 그림을 논했다.

인상주의 색채가 짙은 <오르막길(1881)>

그는 1874년 인상주의 첫 전시회에는 기획자로 참여했다.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8점을 출품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했다. 한편 모네를 비롯하여 가난한 동료 화가들을 작품을 사주었고, 재료비와 임대료를 지원했다 동시에 전시회를 재정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그 부유함에 묻혀 작품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역효과가 발생했다.

1894년 마흔다섯 살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유언 집행인이었던 르누아르가 난처한 지경을 맞았다. 공개 전시를 조건으로 그의 컬렉션 65점을 프랑스 정부에 모두 기증하려 하였으나 문화정책 담당자들로부터 거부당했다. 정치인, 아카데미 회원, 평론가들은 인상주의 작품이 미술관에 전시하는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반발했다. 심지어 신고전주의 화가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은 “정부가 이런 오물을 받아들인다면, 대단한 도덕적 해이가 찾아온다”는 학사원의 입장을 전달했다. 모네의 16점 중 8점, 피사로 7점, 르누아르/시슬레 6점, 마네/세잔 2점, 그리고 드가만 7점 모두 수용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카유보트 작품은 <대패질하는 사람들>만이 국가 소유로 이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카린 H. 그림, <인상주의>) 결국, 나머지 소장품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195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의 예술적 재능도 재평가되었다.

keyword
이전 08화에드가 드가와 드레퓌스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