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와 드레퓌스 사건

by 노인영
<오페라 교향악단(1870)>

인상주의 화가를 일러 ‘빛의 화가’라 한다. 하지만 빛을 통해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각자의 시선은 다른 방향을 지향했다. 그중 활발히 교류하면서도 자신이 인상주의 작가로 분류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화가가 두 명이 있다. 마네와 드가이다. 두 사람은 체계적인 회화 이론을 배경으로 다양한 실험적인 활동을 했다. 그래서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특정 부류로 자신이 규정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대응 자세는 서로 달랐다. 마네는 인상주의 전시회를 철저히 피해 살롱에 참여했다. 반면 창립회원인 드가는 자신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살롱과 단절을 선언했다. 그리고 자기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인상주의 전시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총 여덟 번의 전시회 중 모두 일곱 번 참석한 그가 인상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꺼린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의 차별성에 있다. 1855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양식을 좇았다. 체계적인 이론을 갖췄고, 특히 드로잉이 뛰어났다. 마네와 비교되는 최고 수준이었다. 드가는 외광(外光) 보다 실내조명으로 인한 빛의 효과에 집중했다. 서른여섯 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어 야외의 강한 햇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이루어진 대안이다. 결국, 말년에 그는 실명 위기에 빠진다. 자연보다는 인물을 담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드가가 모네에게 말했다.


“자연은 자네를 위한 것이지만, 인위적인 것은 나를 위한 것이네.”

<부정 출발(1869~70)>

인상주의를 일러 새롭게 등장한 사진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만큼 1839년 카메라 등장은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상이나 풍경에서 사진이 보여주는 사실 포착 능력은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이 화가의 역할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회화의 주된 흐름이었던 자연의 재현이라는 기능을 다시 생각해야 했고, 그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사진이 포착할 수 없는 내면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빛에 의한 인상적 순간을 담는 방밥으로 표출하였다. 사물을 단순히 복제하지 않고 색의 강렬한 영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영역을 개발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드가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카메라를 몇 대 소장했던 그는 역으로 사진 기법을 회화에 창조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구성에 있어서 인위적인 연출이 많았는데, 스냅사진처럼 우연과 자연스러움을 가장했다. 그리고 잘려 나간 이미지를 통해 화면 바깥과 소통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움직임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경마 연작에도 사진을 활용했는데, 말의 순간적인 동작에 관한 인식의 오류를 확인해 주었다. “예술은 거짓된 수단을 통해 진실인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 드가의 신념이었다.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 하지만 드가는 전체적으로 주제 선택에 있어서 관행적인 태도를 버리고 도외시된 일상적 대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인상주의와 기본 덕목과 함께했다.

*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① 말이 뛸 때 네 개의 발이 동시에 공중에 떠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는 의견과 ② 네 발 모두가 지상에서 떨어질 때 발의 모습이 바깥으로 쭉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오므릴 때라는 점을 지적한다는 견해로 나뉜다.

사진의 구성을 가장 잘 활용한 <압생트(혹은 카페에서, 1876)>

1870년경부터 드가는 파리 오페라 무대 뒤를 기웃거리면서 실내조명 아래 삶을 관찰했다. 교향악 단원 데지레 디오(<오페라 교향악단>의 전경 중앙 바순 연주자)와 친해져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교향악단에 머물렀던 관심은 무대 위 무용수로 옮겨갔다. 특히 어린 무용수가 상류층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는 데 분노했다. 그를 비혼의 여성 혐오주의자로 불렀지만, 사실 여성의 내밀한 사적 세계와 누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부유층 남성들을 혐오했다. 회화 작품 무용 연작 곳곳에서 이런 감정을 드러낸다.

<열네 살 어린 무용수(1881)>

그는 단 한 차례 조각 작품을 출품했다. 인상주의 제6회 전시회 때 <열네 살 어린 무용수>가 그것이다. 2차원 평면에 담아내던 발레리나의 순간적인 역동성을 3차원 공간으로 옮겼다. 밀랍으로 만든 작품이 훼손되지 않게 유리 상자 안에 넣어 전시했는데, 비판이 잇따랐다. “조잡하고 볼품없다”는 비난이었지만, 당시 발레리나가 처한 사회적 야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대한 불편함이라고 추측한다.

모델은 벨기에 이민자 출신 무용수였던 마리 반 궤텐이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 살림을 거들고자 어린 나이에 무용수가 되었다. 당시 발레리나는 육체적으로 무척 고된 직업이어서 교사보다 두세 배가 넘는 봉급을 받았다. 아버지가 죽자 그녀는 언니와 함께 모델부터 매춘까지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작품 속 얼굴에는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대신, 긴장과 피곤함으로 찌푸린 미간이 노출되었다. 어깨를 뒤로 젖혀 펴는 동작이 기계적이고,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삶을 체념 혹은 달관한 듯 모호한 모습이다. 드가는 시중에서 파는 실제 모슬린(씨실과 날실을 모두 가는 소모사의 단사로 짠 너비가 넓은 면직물)으로 된 발레용 스커트를 입혔고, 매끄러운 리본을 맸다. 당시 조각은 청동과 같은 재료로 작업했는데 레디 메이드(기성품)를 이용한 혁신적인 시도였다. '고귀한 예술'이란 개념을 뒤집는 그의 실험정신을 드러냈다.


이즈음 완성한 ‘빈자들의 마약’이라고 일컫던 <압생트>는 새로운 차원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타락한 군상(群像)이 회화의 주제로 적합하냐?”는 문제였다. (제목 그림은 <기다림(1880~1882)>)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지성'을 갖췄음에도 그의 현실 비판은 신랄하지 않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데서 오는 한계라 하겠다. 그의 할아버지가 나폴리에 은행을 설립했고, 아버지가 파리 지점을 운영했다. 열여덟 살에 방 하나를 스튜디오로 개조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고독한 사생활을 추구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1886년 이후 그는 단 한 차례 뒤랑 뤼엘 화랑에서 일련의 파스텔 풍경화만을 대중 앞에 공개(1892년)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드가는 예술계에서 갈등의 중심에 섰다. 유대인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유형을 판결받은 사건이다. 정보 서류의 필적이 비슷하다는 것 외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유대인으로부터 국가를 구해야 한다’는 눈먼 애국심이 사태를 확산시켰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수치심이 작용했다. (김경집, <생각의 융합>)

단순히 유대인 장교의 유, 무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가 시민의 인권을 박탈할 수 있느냐’로 쟁점이 옮겨갔다. 프랑스 전체가 드레퓌스의 지지자와 반대파로 극명하게 양분되었다. 이때 드가가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반대편에서는 세잔의 고향 친구 에밀 졸라가 <로르르>지 1면에 실린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글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1906년까지 무려 12년간 격돌했던 이 사건은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이 재빨리 도망갔고, 최고 재판소는 무죄 선고를 하면서 끝났다. 결국, 드가는 자신의 논쟁적인 성격으로 인해 많은 동료 화가를 잃었다. 그리고 1917년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 예술가에게 현실 참여는 적정한 수준이라는 기준점이 매우 모호하다. 넘치면 프로파간다로, 모자라면 세속적이라는 비난을 자초할 수 있다.

keyword
이전 07화인생의 즐거움만 담은 르누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