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

by 노인영

1874년 4월 15일, 드디어 인상주의 제1회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파리 코뮌의 격랑이 휩쓸고 지나간 지 겨우 3년 만이다. 특정한 화풍을 지향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무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유한회사'란 이름으로 결성한 30명의 미술가가 참여했다. 살롱전에 대항해서 열린 첫 민간 전시회로, 별도의 유통 채널을 확보했다는데 의미가 크다.

이들은 살롱전에서 떨어진 ‘낙선전’으로 비칠 것을 염려했다. 정회원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모리조, 피사로, 벨리아르, 기요맹, 르피크, 르베르, 루아르이다. 전시장은 언론인이자 풍자화가이기도 했던 탁월한 사진사 나다르가 카퓌신 대로 주변 자신의 스튜디오를 비워 무료로 빌려주었다. 그는 1858년 열기구를 타고 최초로 공중 촬영하여 유명해졌다. 전시회 이후 화단에서는 단결력을 갖춘 집단이 중요해졌다. 훗날 고흐가 꿈꾸었던 공동체도 인상주의 화가들에게서 개인의 합을 뛰어넘는 시너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인상, 해돋이(1872)>

도미에가 일했던 <르 샤리바리>의 미술평론가 루이 르로이가 참석하여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 해돋이>를 감상했다. 2년 전에 완성한 이 작품은 항구의 해돋이를 윤곽선도 없이 자유롭게 붓질했다. 모네가 다섯 살부터 지냈던 노르망디 해안가 르 아브르의 집 안 창문을 통해 본 풍경이다. 아니, 풍경이 빚어낸 순간적인 감각이다. 그러나 르로이는 동행한 조제프 뱅상(Vincent Joseph François Courdouan, 1810~1893)의 말을 빌려 <르 샤리바리> 지에 “벽의 벽지가 훨씬 더 완성도가 있어 보인다”고 폄하했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날로 먹는 장인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시회 참여자들은 모임 이름과 관련하여 ‘자연주의자’로 부르자는 에밀 졸라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르루아가 냉소적으로 붙여준 이름 ‘인상주의’를 기꺼이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 회화에 대한 관념과 인상주의 작품에 관한 인식을 엿볼 수 있기에 르루아의 기사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엔 모네의 <카퓌신 대로, 파리>다. <인상, 해돋이>와 함께 출품했다.


모네 카퓌신 대로 1873.png <카퓌신 대로, 파리(1873)>

나(르루아)는 신중하지 못하게 (<출항하는 어선>에 이어) 같은 화가의 <카퓌신 대로> 앞에 그를 너무 오래 내버려 두고 말았다. ‘아, 아!’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비웃었다.

“이제 눈부시다고 해야겠군, 인상적이야. 그런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그림 아래쪽의 시커멓게 혀로 핥는 듯한 수많은 것들은 대체 뭐를 재현한다고 하면 좋을까?”

“걸어가는 사람들 아닙니까?”라고 나는 대답했다.

“내가 카퓌신 대로를 걸어갈 때 저렇게 보인다는 건가? 이런 활극이 있나! 결국 날 놀리는 게군?”

“뱅상 씨, 진심입니다.”

“하지만 저런 반점들은 대리석을 모방할 때 쓰는 것과 똑같은 수법 아니요, 여기저기 조금씩 흘려 찍고, 낡은 수업이지. 황당하고 끔찍하군! 확실히 충격적이야.” (존 리월드, <후기 인상주의의 역사>)



조제프 뱅상은 풍경이나 바다, 오리엔탈리즘을 주제로 다룬 화가이자 명문 에꼴 데 보자르의 교사, 아카데미 회원, 그리고 큐레이터였다. 따라서 앵그르가 강조했던 데생의 중요성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겼던 부류에 속한다. 그러니 전시된 인상주의 회화는 당연히 그리다 만 것 같은 미완성의 작품으로 받아들였다. ‘혀로 핥는다, 활극, 대리석 반점’이라는 표현이 서슴없이 나오고 조롱하듯 ‘인상적’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뭐를 재현한다고 하면 좋겠는가?”라는 반문은 의미 깊게 들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회화는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신을 위해 바친 중세 때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이 납득할 수 있는 그림이 중요했다. 따라서 자연을 똑같이 재현하기 위해서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한 인물, 규정된 색채, 명암법 등이 필요했다. 그런데 원근법의 비례는 유지하였으나 형태가 불명확하고 파괴적인 그림이 출현한 것이다. 작품 속 행인들의 모습에서 뱅상의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나다르가 열기구 타고 사진 촬영하는 도미에의 만평(1863.5.26.)

모네가 창문 너머 <카퓌신 대로>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은 곳 역시 나다르의 스튜디오였다. 나다르란 이름에서 사진이 회화에 미친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 카메라의 등장은 누구나 초상화나 역사화를 담을 수 있는 화가가 되었다는 의미다. 자연을 모방한 그림은 이제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으로 바뀌었고, 화가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중심의 살롱전 심사위원에게는 남의 고통이었다. 살롱전에 입선하여 명성을 쌓은 그들은 아카데미 교사 등 직업이 있고 뒷거래가 가능했다.

결론적으로 인상주의 출현은 작가들이 회화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 즉 혁명이었다. 전통의 살롱전은 신진 화가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이곳에 출품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으면, 유명세와 함께 어느 정도의 출세가 보장된다. 그러나 아카데미 회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전통적인 역사나 종교 또는 신화를 주제로 하는 양식과 기법에 편향되었다. 이 견고한 틀로 인해 자유로운 창의성이 함몰되었다.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젊은 화가들이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기가 망설여지는 이유였다.


살롱의 경직성에 대한 진보적인 화가들의 도전은 2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 등 선구자가 이어갔다. 힘이 조금 축적된 중진 화가들이 뭉쳤고, 1인당 약 60프랑의 돈을 각출했다. 하지만 이런 명분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모두 165점이 출품한 전시회는 첫날 175명, 마지막 날 54명, 4주간 모두 3,500명이 관람했다. 전시회로만 보았을 땐 망했다. 대중은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고, 심사위원의 권위에 복종적인 관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후회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환영받는 혁신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양식의 혁신성과 비교하여 당시 사회적 문제에 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전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화가와 궤를 달리 한 결과이다. 좋게 봐주면, 날씨와 빛의 반사작용을 통해 나타나는 찰나에 몰입한 결과라고 여길 수 있다. 현실에는 고통과 슬픔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양 회색과 갈색조가 압도적이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전체적으로 외광 효과를 유지하기 위해 밝은 원색을 선택했다. 따라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다. 아니면, '충고나 교훈을 담은 그림은 싫다'는 명분 하에 억지로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었을 지 모른다.

하긴 시민들도 제3 공화국(1870~1940) 출범 이후 낙관론에 편승, 무기력해진 가운데 아예 정치를 포기하고 사치와 퇴폐에 몰입했다. 그럴듯한 표현으로는 ‘벨에포크(belle époque, 좋은 시대)’라 부른다. 정치적 격동기가 끝난 후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리에 풍요가 깃들고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면서 평화를 구가한 시기다. “회화는 즐거워야 한다"는 지론을 편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중산층의 웃고 즐기는 모습도 이런 주제 의식에서 연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제목 그림: 피사로의 <몽마르트르 대로(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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