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와 모네, <풀밭 위에 점심식사>

by 노인영

인상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최초의 총체적인 미술 혁신으로 기록된다. 1886년 8회 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집단으로서 인상주의는 끝이 난다. 하지만 이후 등장하는 미술 양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준거가 되었으며, 이 점에서 인상주의는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도 평가받는다. 1860년 초 모네가 앞장섰다. 그리고 르누아르, 시슬레, 바지유가 뒤따르며 바르비종에서 멀지 않은 퐁텐블로 숲 한 모퉁이 샤이이의 내부를 탐구했다. 르누아르와 시슬레는 이때 자연을 처음 체감했을 거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바르비종파 선배들의 조언을 듣게 되었는데 모네는 밀레에게, 르누아르는 디아즈에게, 시슬레는 코로에게 감동했다. 그들은 테오도르 루소가 일러주었듯이 “자연에 대한 때 묻지 않은 인상을 마음에 간직하려고” 애썼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당시 화가의 작업실에는 말린 꽃과 돌덩어리, 달걀 한 판, 기름 한 통이 있었다. 물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이것과 함께 자유로운 이동은 불가능했다. 또 야외의 풍경화를 ‘퇴폐 미술’로 생각하는 풍조였다. 이러한 관습에 도전한 양식이 인상주의였고, 화구의 발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화학 염료의 발명이다. 1824년 프랑스 장 밥티스티 기메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색 울트라마린을 합성했다. 1853년에는 윌리엄 퍼킨이 보라색을, 1861년에는 좋은 색이 없던 초록색 문제를 빌헬름 폰 호프만이 해결했다. 20가지가 안 되는 안료가 19세기 중반까지 40가지의 새로운 화학 요소가 발견되었고, 새로운 제품을 상업적으로 개발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이와 병행하여 초상화가 존 랜드가 1841년 튜브형 물감을 만들었고, 프랑스에서는 1859년에 상용화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돼지 방광에 유화 물감을 담아 사용했다. 르누아르는 말했다.


“튜브 물감이 없었다면 모네도, 세잔도, 피사로도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편의성 만을 염두에 둔 말이 아니다. 중세 이래 천연물감으로 낼 수 있는 색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었기에 '회화는 자연에 종속되었다'는 평가를 받던 시대였다. 그랬던 것이 다양한 화학 물감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의 모사가 비약적으로 충실해졌다. 붓을 쥔 화가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현장의 느낌을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돼지털로 만든 값싼 납작붓이 제격이었다. 얼굴은 점 하나로 간단히 마무리했다. 바다의 배, 연기를 내뿜는 증기기차도 성의 없는 듯 짧은 붓질로 모호하게 처리했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기성 화단에서는 이런 식의 불완전한 마무리를 참을 수 없었다. ‘이게 그림이냐?’고 비웃었다. <피가로>의 비평가 볼프는 르누아르가 그린 여성의 피부 색채를 보고 부패한 시체 같다고 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혁신은 이렇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올랭피아(1863)>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임에 이질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있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이다. 그는 보불 전쟁(프로이센-프랑스, 1870~1871)에서 입은 다리 부상으로 인한 류머티즘이 악화하여 1883년 4월 30일 51세로 사망했다. 엄격히 구분하면, 그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며 말년에 그의 색채가 가벼워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평생 인상주의 전시회에 동참하지 않았다. 1867년 개인전에서 제작 의도가 ‘자신의 인상을 담아내려는’ 것이라고 밝혔음에도, 순간적인 변화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룹 내 예술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일찌감치 모네를 압도했다. 구도와 형식에서 엄격하면서도 주제 선정과 표현기법에서 과감했다. 들라크루아와 쿠르베에 이어 화단에 만연하고 있는 정형화된 허상을 벗겨버리고 근대적으로 쇄신코자 했다. 실제 인물을 모델로 매춘부의 누드를 그린 <올랭피아>가 그중 유명하다. 1865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입선한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를 패러디하면서도, 원근법이 돋보이는 후경을 커튼으로 가리는 구성을 택했다. 회화라는 사실을 인지케 하려는 의도, 즉 평면성을 강조한 것이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2~1863)>

그러나 먼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풀밭 위의 점심식사>다. 역시 중산층의 도덕적 위선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제2 제정기에 가장 큰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1863년 살롱 출품작으로 파리 외곽 아르장퇴유의 센강에서 목욕하던 여자를 본 경험이 기초가 됐다. 루브르에 있는 티치아노의 <전원음악회>의 구도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전원음악회>처럼 네 명의 시선을 모두 다른 방향으로 향하도록 했다. 원래 제목이 <목욕>이지만, 누드가 기존의 전형(典型)과는 거리가 멀다. 후경 여인은 옆에 있는 보트가 작아 보일 정도로 크게 묘사했고, 멀리 있음에도 초점이 뚜렷하다. 전통의 원근법을 비틀었다.

<올랭피아>처럼 피부의 중간 색채를 배제하여 평면성을 더욱 강화했다. 두 명의 미술학도는 자기 동생과 장차 처남이 될 페르디낭 렌호프다. 여성 두 명도 신화 속 여신이 아니라 실재(實在) 인물이었다. 전경 누드의 여인은 술집 기타리스트이자 화가였다는 직업 모델 빅토린 뫼랑이다. 그녀는 어색한 자세로 팔을 굽힌 채 앉아 있다. 그것도 ‘건방진 창녀처럼 뻔뻔스럽게’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뫼랑은 <올랭피아>에도 등장하여 보는 이의 불쾌감을 자극했다. 따라서 대중은 ‘나체의 젊은 여인이 정장을 입은 신사들과 점심을 먹는 장면’을 조롱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네로서는 자기 작품이 커다란 스캔들에 휩싸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고전과 근대가 공존하는 ‘우아한 연회(féte champêtre)’를 제작하려 했을 뿐이다. 작품은 살롱전에서 ‘역사적 교훈이 없고, 원근감에 깊이가 없으며, 무례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가 허락한 ‘낙선전’은 마네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드가의 말처럼 ‘가리발디(이탈리아 통일에 헌신한 장군이자 정치가)’만큼이나 유명해졌다.


모네, <풀밭 위에 점심식사(1865)>

모네를 비롯해 피사로, 시슬레, 드가, 세잔 등 동료 화가 모두가 마네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마네에 대한 살롱의 차별적 대우에 분노한 모네가 같은 제목 <풀밭 위에 점심식사>를 그렸다. 정작 마네는 ‘모네’라는 이름을 그해 살롱전에서 처음 확인했다. 자신이 일으킨 스캔들을 이용하려고 이름을 도용한 작가로 생각했다. 나중에야 모네가 자신의 열렬한 숭배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네의 작품에는 누드가 사라졌다. 시민들의 한가로운 오후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주제보다는 표현에 치중했고, 색채의 변화가 돋보인다. 일견 마네의 명성에 도전하면서 그가 일으킨 센세이션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낙선전은 중단되었다. 여관비를 낼 수 없게 된 모네는 작품을 둘둘 말아 샤이이에 저당 잡혔다. 창고에 처박혀 곰팡이가 슨 작품은 나중에 모네가 찾아 새로 복원하여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관했다.

그림 세부(왼편, 앉아 있는 쿠르베)

오늘날 마네의 작품과 함께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은 한 조각이 유실된 버전이다. 이전 작품과 비교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잔디 위 천에 앉은 젊은 남자가 쿠르베를 닮은 수염 기른 남자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절친한 친구로 모델을 섰던 바지유가 모네에게 거장 쿠르베가 매우 칭찬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워졌다. 아들 장을 낳고 아버지의 반대로 3년 만에 성사된 1870년 모네와 카미유의 결혼식에서 쿠르베가 증인을 섰다. 이래저래 모네로서는 초기작 <풀밭 위에 점심식사>를 통해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마네와 교류도 활발해졌다. 9년이 흘러 마네는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있는 모네의 가족>을 그렸다. 모네로선 경제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바지유가 3년 전 전사한 이후라 마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내 운명은 법원의 집행관 손에 달렸습니다.”


수시로 20프랑, 50프랑씩 빌렸다. 작품 배경이 된 센 강변에 꾸민 정원의 집도 마네의 도움으로 1년 전에 세 들었다. 그렇다고 마네가 결코 여유로운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작업실에 동료의 그림이 더 잘 보이도록 걸어 놓았다. 가난한 친구들을 우선하는 마음이었다. 1874년은 마네에게 있어서 화풍 상 대전환을 가져오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검은색’ 시기를 벗어나 밝은 색채로 바뀌었다. 처남 페르디난트 렌호프와 함께 네덜란드를 다녀온 이후의 변화였다. 1872년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과 함께 프란스 할스 미술관을 방문했는데, 빈에서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았을 때와 같은 감동을 받았다. 이후 기피했던 인상주의 기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마네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있는 모네 가족 1874.jpg
르누아르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있는 카미유 모네와 아들 1874.jpg
마네의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있는 모네의 가족(1874)>과 르누아르 <카미유 모네와 아들(1874)>

그는 후배에게서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때마침 도시에 깊이 빨려든 르누아르가 파리를 벗어나 모네 집을 찾았다. 마네 옆에서 같은 주제의 <아르장퇴유의 집 정원에 있는 카미유 모네와 아들>을 그렸는데, 닭까지 캔버스에 담았다. 그러나 불안정한 구도, 음영, 색채에 이르기까지 전성기 르누아르 솜씨와 편차가 심하다. 마네가 모네에게 귀엣말로 전했다.


“재능이 없어요. 저 친구! 당신이 친구이니 그림을 그만두라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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