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살롱전’의 의미

by 노인영

프랑스에서 미술 전시의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에게 익숙한 ‘살롱전(Le Salon)’은 태양왕 루이 14세 때 탄생했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른바 살롱 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1648년 수석 궁정화가 샤를 르 브룅(Charles Le Brun, 1619~1690)의 제의로 왕립 미술학교(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먼저 세워졌다. 절대 왕정을 홍보할 미술가를 양성코자 함이다. 하지만 프랑스 미술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제 미술가들은 스승의 작업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이어 17세기 유럽 회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위대한 시기를 체험한다. 푸생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으며, 19세기까지 여기서 교육, 비판적 성찰, 전시와 토론 등을 통해 프랑스 미술을 견인했다. 다만 회화에 있어서 장르간 계급을 부여했다. 역사화와 장르화를 '고급 장르'로,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를 '부차적 장르'로 구별했다.

전시회는 그해 왕의 대부 마자랭 추기경이 만든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의 졸업생 작품전으로 출발하여 200년 동안 국왕의 후원 아래 개최되었다. 1667년 왕립 미술학교 후원으로 살롱 카레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졌는데 제한된 인원에게만 개방된 반(半) 공공의 성격이었다. 1673년부터는 브리옹 궁전 내에서 정기적으로 회화전을 열었다. 그리고 출품작 중에서 최우수작을 선발하여 ‘로마상’을 수여했다.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5년간 기숙하면서 로마의 분교(1666,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서 무료로 연수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했다. 부상(副賞)인 셈이다. 1692년 루브르 건물에 왕립 아카데미가 들어서고, 1699년에 첫 번째 ‘살롱’ 형식의 전시회를 비롯하여 초기 회화전은 루브르 박물관 그랜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1737년부터 살롱 카레로 이전되었으며, ‘살롱전’이라는 이름은 이때 생겼다.


알렉산드르 브룅(Alexandre Jean-Baptist(1853~1941), <루브르의 살롱 카레의 모습(1880)>

본격적인 살롱전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1751년 7월 1일 <과학, 기술, 직업에 대한 종합사전>이라고 불리는 <백과전서>가 첫 권이 출판되었다. 계몽주의 이론을 보급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된 이 책에는 총 3,123개의 판화로 구성된 도판이 삽입되었다. (다니엘라 바라브라, <바로크와 로코코>) 예술이 대중을 사회적으로 교육하는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용성과 기능성이 중시되자 과도한 장식이나 화려한 치장을 중시했던 바로크나 로코코 양식은 존재 가치를 잃었다.

그러나 내정의 어지러움에도 프랑스는 어느새 문화 대국으로 성장했고, ‘살롱전’이라는 문화 이벤트는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예전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국전(國展)’과 같은 성격이다.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2년에 한 번씩 개최되다가 1년에 한 번 3월부터 6월 말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아카데미 회원으로 제한했던 출품 자격은 대혁명의 영향으로 1791년부터 모든 작가에게 개방했다. 이로써 젊은 화가들에게 등용문 역할을 했으며 전시회를 통해 미술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비야르 살롱전에서의 우후 4시 1847.png 프랑수아 오귀스트 비야르(Francois Auguste Biard, 1799~1882), <살롱전의 오후 4시(1847)>

19세기 중반 살롱 관람객 수는 연간 100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이 규모는 당시 파리 전체 인구에 육박했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예술이 곧 삶의 한 부분, 즉 일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살롱전을 주관하는 심사위원들의 사고방식이 진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카데미 교수들과 정부 관리들의 심사 기준은 변화에 뒤처졌다. 푸생의 고전주의를 숭배한 이들은 소묘가 색채보다, 역사화가 장르화보다 앞선다는 생각에 여전히 묻혀 지냈다. 이와 관련 3번 낙선의 불쾌한 기억이 있던 다비드는 1793년 혁명 지지자들 사이에서 관행적인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폐지하는데 표를 던진것은 역설적이지만, 개방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앵그르 때 이르러 경직성은 극심해졌다. 그는 토론을 허용하지 않았고, 제자들은 새로운 예술에 대한 모험을 시도할 의지도, 수용할 관대함도 없었다. 1849년부터 살롱에서는 1,2,3등급의 메달이 수여되기 시작했고, 1857년부터 가작(honorable mention)을 선정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의 제2 제정 시대에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 미술전이 절정이었다. 28개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했다. 지난 20년간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던 앵그르가 별관에서 40점이 넘는 유화와 소묘를 전시했다. 1863년 나폴레옹 3세가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정로부터 독립시키고, 에꼴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란 이름의 5년제 고등교육기관으로 전환했다.

반면 선(線)의 독재에 맞선 그의 적수, 들라크루아는 35점의 유화로 중앙 홀을 장식했다. 코로, 도비니, 용킨트, 그리고 밀레도 출품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기사를 통해 들라크루아의 승리를 선언하면서 앵그르가 “정력적 기질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전시회의 거의 모든 메달과 상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앵그르 주변의 추종자들에게 돌아갔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당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피에트로 안토니오 마티니의 판화 <1787년 살롱>

훗날 인상주의 화가로 신분을 바꾸는 드가가 이때 앵그르의 <터키의 욕탕>의 소유자인 에두아르 발팽송을 설득하여 출품을 성사했다. 피사로는 전시된 코로의 풍경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전시회가 미술사적으로 중요했던 점은 쿠르베가 자비로 최초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작품 두 점이 거부당하자 정부 중심의 살롱전에 정면 도전한 것이다.

상황이 고약해지자 1863년 제국의 칙령으로 전시회를 연례적으로 개최하며, 심사위원의 1/4만을 행정당국이 지명하고 나머지는 전시 작가들이 선출하는 절충안을 도입했다. 그러나 출품작 5,000여 점 가운데 3,000여 점이 거부당했다. 편파적인 심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가 동요하는 예술계를 진정시키려 별도의 ‘낙선전(Salon des Refuses)’을 열어주었다. 낙선 작품의 한계성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때 유명해진 작품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이다.

에두아르 마네의 <파리 만국박람회 전경(1867)>

1867년 만국박람회에서는 마네가 쿠르베를 따라 알마 광장에 별도의 개인 전시장을 짓고 50여 점을 걸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 10여 명이 향후 살롱전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의 연례 전시회를 개최하기 위해 2,500프랑을 각출했다. 이 계획은 곧바로 성사되지 않았으나 인상주의 첫 전시회의 동력으로 작동했다. 한편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드 니티스(Giuseppe de Nittis, 1846~1884)가 만국박람회에서 선진 기술과 예술적 발전을 목도하고 파리에 둥지를 틀기로 결심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끌었던 이탈리아인이라는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만큼 파리가 예비 화가로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할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확고하게 성장했다는 방증이다. 1869년에는 예술의 수준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살롱전의 상금을 100,000프랑으로 파격적인 인상을 하고, 심사위원의 2/3를 한 번이라도 살롱에 입선했던 모든 작가가 선출할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심사위원의 얼굴은 바뀌지 않았으며, 화가들은 어떤 심사도 없는 전시회를 고대했다. 1874년 최초의 민간 전시회가 개최하면서 인상주의가 탄생했다. 1881년 정부는 결국, 연례 살롱전의 공식 후원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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