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유배 중인 1814년부터 1815년에 걸쳐 빈(Wien)에서 90개 왕국, 53개 공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이들이 유럽의 신질서(빈 체제, 1815~1848)를 수립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 그의 재위 기간(1814~1815.3.20/1815.7.8~1824)은 둘로 나뉘는 데 나폴레옹의 복귀가 그 빈틈을 메꾼다. 혁명 정신이 후퇴했으며, 입헌군주제는 지켜지지 않았다. 동생 샤를 10세와 마지막 국왕 루이 필피프가 절대 왕정으로 복귀하려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지난 세월을 낭만주의라며 아름답게 치장한다. 그러나 1848년 2월 노동자와 시민이 혁명다운 혁명을 일으키면서 그 낭만이 깨어졌다. 선거권이 문제였다. 루이 필리프 시대의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하였고, 소수의 ‘금융 귀족’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 4월 23일 보통선거로 의회를 구성하고, 유권자 수를 25만 명에서 900만 명으로 늘렸다. 파리보다는 지방이 지배권을 갖게 되는 결과를 도출했다. 선출된 의원 900명의 절대다수가 공화주의자와 온건파였다.
의회는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기로 결정했다. 이제 또 다른 나폴레옹이 등장할 차례다.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에게는 샤를 루이 나폴레옹(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루이 필피프가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면서 마련된 통령 선거에서 압도적 표차(550만 대 150만)로 당선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따라서 강력한 정권을 세웠던 영웅을 존경하며, 이런 면에서 삼촌 보나파르트의 후광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는 집안의 공식대로 3년 후 쿠데타를 일으켜 1852년 제2 제정의 황제가 된다. 스물한 살 젊은 나이에 죽은 보나파르트의 유일한 적자(로마왕)를 예우하여 스스로 나폴레옹 3세(재위 1852~1870)라 칭했다. 그 유전자를 익히 알고 있던 국민은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다.
쿠데타로 잡은 정권은 정통성이 취약하다. 그 때문에 정권은 국민의 갈채를 지속해서 갈구하며, 그 비결은 경제적 번영과 외교적 성공에 달려 있다. 마흔다섯 살 황제의 경제 정책은 무난한 듯 보였다. 그러나 측근이 무능했고, 외교에서 삐걱거렸다. 국가적 이해관계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 말려들었다. 피에몬테와 힘을 합쳐 이탈리아 점령군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몰아내려 했다. 1859년 마젠타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가까워지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프랑스는 사보이와 니스를 얻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861년 이후 멕시코의 부(富)를 탐했으나 실패했다. 1865년에는 비스마르크에게 속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최소한 라인란트 지방이나 벨기에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외교정책은 참패로 끝났다.
의외의 사건이 스모킹 건의 역할을 했다. 1870년 7월 3일 프로이센 레오폴드 공(公)이 이사벨라 2세와 결혼,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프로이센은 이미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는데, 스페인으로 세력을 확장한다면 프랑스는 그야말로 샌드위치 신세가 된다. 다행히 레오폴드 공 자신이 프랑스의 즉위 철회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은 프랑스는 한발짝 더 밀어붙였다. ‘앞으로도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족이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별러 오던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를 전쟁의 기회로 활용했다. 프로이센과 프랑스 국민 모두를 격앙케 하여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게끔 연출한 것이다. 전보문을 이중으로 만들어 신문에 공표했다. 일종의 가짜 뉴스였던 셈이다. 프로이센 국민에게는 프랑스 공사가 약속을 받아내려 엠스에서 휴양 중인 빌헬름 1세에게 매우 무례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에게는 프로이센 왕이 오히려 공사에게 외교적 모욕을 주었다고 했다. 흥분을 잘하는 프랑스 국민이 먼저 폭발했다. 결국, 의회가 7월 19일 선전 포고했다.
하지만 프랑스엔 동맹국이 없었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준비가 충분치 않았다. 반면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연방에서 최강국 자리에 올랐다. 프랑스는 니일 법안을 만들었다. 국민방위대의 훈련 기간을 한 해 4개월로 늘린 후 전시가 되면, 정규군으로 동원하려 했다. 하지만 예산 문제로 훈련 기간이 15일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런데도 프랑스는 자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했다. 루이는 1870년 초 15일 만에 40만 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실제 동원된 병력은 25만 명뿐이었다. 보오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를 비롯하여 여타 공국이 프로이센을 협공하리라 기대했으나 장밋빛 전망이었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전쟁 도발에 앞서 이미 군사력 점검을 마친 상태였다.
개전이 되자 전황은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흘렀다. 전선에서는 프랑스의 패전 소식만 들려왔다. 몰트케가 지휘하는 프로이센군은 장비, 작전, 훈련,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9월 2일 벨기에 국경 근처 스당(Sedan)에서 프랑스군 주력부대인 맥마흔 원수 휘하 전 부대원 10만 4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루이 나폴레옹은 “아군은 항복했고, 나는 포로가 됐다”고 전문을 낭독해야만 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45일 만인 9월 4일, 제2 제국은 무너졌다. 아헨에 머무는 동안 그는 주민들로부터 “(연금 장소인) 카셀로 꺼져라”는 야유를 받았다고 한다. 일찍이 없었던 굴욕스러운 참패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파리 시민들이 결사 항전했다. 대혁명 기간 내내 죽은 인원보다 이때 사망자 수가 더 많았다. 유럽은 프랑스인의 결기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871년 1월 28일 파리도 마침내 성문을 열고 휴전을 받아들였다.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고, 알자스-로렌 지방 대부분을 할양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열흘 전인 1월 18일 '프랑스의 자존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했다.
패전국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국민회의를 소집했다. 2월 8일 프랑스 전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왕당파가 60%가 넘는 의석을 차지했다. 왕당파 의원들은 정권 장악에 눈멀어 있었다. 프로이센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면서까지 왕정복고를 꾀하려 했다.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한 파리 시민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임시정부의 무장 해제 지시에 반발하여 3월 26일 파리코뮌을 구성했다. 지식인과 예술가, 그리고 시민들도 합세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유럽 전역은 정치 중심에 등장한 노동자 계급에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임시정부는 적국 프로이센으로부터 돌려받은 군대로 프랑스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사태가 정리되었다.
두 달 만에 약 2만여 명의 사망자(추산)를 냈다. 이후 전쟁 배상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도 프랑스 국민은 저력을 발휘했다. 정부가 내놓은 공채는 두 배 반이나 신청이 쇄도하여 거액의 배상금을 단시간에 지급 완료할 수 있었다. 여기엔 파스퇴르가 개발한 저온 살균 기술로 와인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지속적인 재정 안정으로 1875년 대통령제 공화정을 수립한 제3공화국(1870~1940)의 그해 정부 예산은 1억 프랑의 흑자를 남겼다. 주요 원자재 생산량이 석탄 60%, 철강 26%, 주철 23%가 증가했다. 1871년부터 1875년에 1만 8,000km의 철도를 추가로 부설했고, 해외 무역은 21%가 늘었다. 1878년에 열린 파리 박람회는 프랑스의 재기를 대외에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몹시 놀란 비스마르크가 그해 베를린 회의에서 튀니지를 프랑스에 양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