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프리메이슨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모차르트의 라이벌 살리에리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자.
앞선 2편에서 언급하였듯이 대주교로부터 독립하게 된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정착하여 자신의 신동 타이틀을 넘어 최고의 작곡가이자 연주자로 그 명성을 높였다. 당연히 그의 이름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귀에도 들어간다. 황제는 모차르트의 실력을 보기 위해 자신의 궁으로 불렀고,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된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2세. 그뿐만 아니라 역대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은 모두 음악을 사랑했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으로도 서유럽의 중심이었으며, 다른 지역보다 민족도 다양하고 귀족과 시민의 교류가 활발했다. 때문에 이러한 성향이 예술에도 나타나 다른 지역보다 자유롭고 관대한 정서를 갖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 사조 중 고전주의의 대표 주역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은 모두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빈’은 현재까지도 기악음악의 중심지이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와는 달리 더 큰 명성과 더 높은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오스트리아 궁정 음악가의 자리를 원했다. (그리고 레오폴트 역시 모차르트가 이 자리를 차지하길 바랐다. 독립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하지만 이미 궁정 음악가로 있던 살리에리의 방해 공작으로 모차르트는 황제의 실내 음악 작곡가에 임명되는 것으로 그쳤다. 예상컨데 원체 모차르트는 그리 예의 있거나 점잖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 큰 방해공작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화. 현재까지도 월등한 일인자를 보며 열등감과 무력감에 빠진 이인자의 증상을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이런 설 때문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라이벌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이미 모차르트는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살리에리 역시 그의 명성이 모차르트를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이미 높은 봉급을 받는 최고의 궁정 음악가였다. 때문에 살리에리의 방해공작은 아마 모차르트를 시기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혹시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라이벌 관계로 두기엔 모차르트의 실력이 월등했다.
그러면 어쩌다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가 ‘라이벌’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을까?
예전 사람들도 막장을 참 좋아했나 보다. 당시 대중들은 부유하지만 재능이 모자란 살리에리와 가난하지만 신이 편애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를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이를 모티브 삼아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극시를 쓴다. 이후 이 작품은 오페라가 되어 인기를 얻었다. 20세기에는 영국의 희곡 작가 피터 쉐퍼가 <아마데우스>라는 연극을 썼고, 이를 영화화한 것이 영화 <Amadeus>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포스터. 하지만 그 누구도 모차르트를 '아마데우스'라고 부른 적은 없다. 이 영화는 각종 상을 휩쓸며 1984에 개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음악가의 전기 영화 중 역대 흥행 순위 8위에 자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우리의 생각만큼 그리 격정적이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굳이 예측해보자면 살리에리 혼자만의 시기였다고 본다.
그러면 이제 모차르트의 친구들,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스러운 단체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렇게 나까지 알게 된 거 보니 그 존재가 더 이상 비밀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아직도 입단식만큼은 비밀로 진행된다고 한다)
프리메이슨은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걸친 비밀 결사대였고, 많은 지식인과 중산층 프로테스탄트(16세기 종교혁명 이후의 개신교인)들이 단원으로 활동했다. 비밀 결사대이다 보니 다양한 설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중세 이후의 석공 길드에서 파생하여 18세기에 계몽주의 사조가 더해져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는 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혁명도 이와 같은 표어를 걸고 시행되었기에 이 단체가 정치적인 단체라는 설도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이후 미국에서도 자리를 잡게 되어 조지 워싱턴, 루스벨트, 트루먼 등 역대 미국 대통령들 또한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었다고 알려지며 미국의 1달러 지폐 속 피라미드와 그 위에 떠있는 눈 그림은 프리메이슨의 교의를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모차르트 역시 1달러 지폐처럼 자신의 작품에 프리메이슨의 교의를 나타냈다. 대표적인 작품은 '밤의 여왕 아리아'로 유명한 오페라 <마술 피리>이다.
*‘밤의 여왕 아리아’는 세계 3대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고 불리는 조수미 님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곡이다. (듣고 보면 '아 이거!' 하게 될 거다) 일단 소프라노에게도 음역대가 높은 곡이며 굉장히 기교적이기 때문에 ‘조수미처럼 정확한 음정으로 밤의 여왕 아리아를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라는 찬사와도 같은 평을 듣는다. 유튜브에 검색해서 제발 딱 한 번만 보자.
일단 이 오페라는 정확하게 오페라가 아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음악극을 ‘오페라’라고 칭했고, 마술피리의 정확한 장르는 독일어로 이루어진 음악극 ‘징슈필(Singspiel)’이다. 모차르트가 자리 잡은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정통 오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귀족과 돈이 있는 중간 계층뿐이었다. 그래서 징슈필은 대중들을 위해 독일어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오페라에 비해 대사의 비중도 더 많고 희극적인 내용이 더 많았다. 이 작품의 초연 역시 오페라극장이 아니라 시장 속 극장에서 비교적 싼 티켓값으로 이루어졌다. 어쩌면 이 작품의 장르부터 프리메이슨의 정신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겠다.
<마술피리>는 밤의 여왕의 부탁으로 납치당한 공주님(파미나)을 구하러 가는 왕자님(타미노) 이야기로 시작된다. 밤의 여왕은 타미노에게 파미나가 납치되었다고 했지만, 공주를 구하는 과정에서 여왕이 속한 밤과 마법의 세계가 ‘악’이었고 공주를 납치한 사람(자라스트로)의 이성의 세계가 ‘선’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타미노 역시 파미나와 함께 빛으로 이루어진 ‘이성의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통과하여 결국 둘은 '이성의 세계'의 사람이 됨과 동시에 결혼에 성공한다. 타미노의 조력자로 말하는 반인 반조가 나오기도 하고 제목 그대로 ‘마술 피리’가 나오는 등 매우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대본작가 에마누엘 쉬카네더는 핀란드 동화집 속 고대 이집트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모차르트는 각각의 캐릭터가 가진 특색을 음악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며 이 징슈필은 매우 인기를 얻는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모차르트가 이 징슈필에 무엇을 담아냈는지 보자.
일단 타미노가 ‘이성의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침묵의 시험, 물의 시험, 불의 시험을 통과한다. 이 시험들은 프리메이슨의 입단식을 모방한 것으로서, 각 시련마다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보여준다. 비밀 단체인만큼 침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타미노는 침묵의 시험을 통과하기도 하고, 극 중 파파게노가 비밀을 누설하자 그의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또한 프리메이슨은 석공의 망치 두드리는 소리, 자유/평등/박애, 단원을 이루는 도제/직인/마스터 등 숫자 '3'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다. 때문에 공주를 구하기 위한 세 번의 시련, 이야기 속 세 가지 계율, 세 가지 교훈과 항상 세 명으로 이루어진 인물 집단(세 시녀, 세 사제, 세 소년) 등 3으로 이루어진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이 오페라의 중심 조성마저 플랫(♭)이 세 개 들어간 E♭ 장조의 조성이 사용되었다.
실제로 당시 이 작품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논란을 제외하고도 계몽군주 요제프 2세가 죽은 뒤의 정치판에 대해 풍자를 가미한 정치적인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보수는 보수대로 이상적인 ‘이성의 세계’가 자신의 단체를 나타낸다고 주장하였고, 진보는 진보대로 그것이 자신들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둘 다 아니었지만) 모차르트와 극작가 에마누엘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가소로웠겠지)
하지만 성공적인 흥행과 달리 <마술피리>를 작곡하며 건강이 악화된 모차르트는 너무 많은 일에 치여 우울증과 망상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의 집에 찾아와 죽은 자를 위한 미사곡인 ‘진혼곡’의 작곡을 의뢰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