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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an 29. 2022

모차르트는 태교에 정.말. 적합할까?(4)

모차르트의 비극적인 죽음과 그 이후에 남은 것

1791년, 신동 시절부터 35살까지 끝없는 일정을 소화해왔던 모차르트는 급격한 체력 저하를 느꼈고, 그로 인한 조울증과 망상증이 심해졌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독약을 먹이고 있다는 말을 하거나, 심지어 자신에게 진혼곡(requiem,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을 의뢰한 검은 옷의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저승사자라는 말을 해댄다.


실제로 그를 찾아온 검은 옷의 남성은 모차르트에게 몰래 부인의 진혼곡을 의뢰한 뒤, 자신이 부인을 위해 직접 쓴 곡이라며 자랑하기 위해 정체를 숨긴 귀족이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이 자신의 진혼곡이라는 것을 철저히 믿고 죽기 전까지 이 곡을 작업하였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모차르트의 죽음 이후 제자가 완성한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ixAWkjyhx0

그리고 그가 죽기 전 처제인 ‘요제파 베버’에게 간호를 받았는데 죽기 직전에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혀에 죽음의 맛이 느껴져”


이 말을 남긴 바로 그날, 모차르트는 생을 마감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모차르트가 죽는 장면에서 그의 마지막 진혼곡을 삽입하였다.


그의 죽음으로도 충분히 슬프지만, 안타깝게도 모차르트는 죽은 뒤에도 곤욕에 시달려야 했다.


모차르트가 죽은 그다음 날, 모차르트 여제자의 남편이 찾아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를 상처 입히고 본인은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여제자가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뱃속의 아기가 모차르트의 아기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모차르트의 죽음이 그를 시기하던 살리에리의 독살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죄의식에 시달린 살리에리는 정신 병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몇 년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장례식 또한 처참했다. 모차르트는 화려하게 장례를 치를 수 있는 귀족도 아니었거니와 모아둔 돈도 없었다. 그래서 다른 시신들과 함께 빈 외곽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친구도, 가족도, 그 누구도 그의 무덤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도 모차르트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들은 어땠을까?


일단 모차르트의 진정한 사랑이자 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와 함께 병으로 죽겠다고 그의 시체 옆에 나란히 누워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슬픔도 잠시, 그들 사이에는 두 명의 어린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체는 여기저기 도움을 받으러 다닌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가족들에게 유산을 하나도 남겨주지 못해 괴로워했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을 불쌍히 여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고 자선 공연을 열어주었다. (이렇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모차르트의 장례식 때에는 어디 있었을까) 콘스탄체는 그렇게 다시 돈을 모아 재혼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공무원이,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작곡가 겸 연주자가 되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외동아들이었고, 이 두 아들은 모두 자식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모차르트가(家)는 이렇게 맥이 끊기고 말았다.


*모차르트의 둘째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년 7월 26일 ~ 1844년 7월 29일)’은 아버지를 따라 음악가가 되었으나, 프란츠가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기엔 태어난 지 다섯 달(다섯 살이 아니다!)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가르침을 받아 모차르트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 때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세’로 음악 활동을 하였으나 아버지에 비해 월등히 모자란 실력 때문에 다시 본인의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예상한다.


일부 학자들은 모차르트의 편지들도 보아 모차르트는 분변 음욕증(배설물에 집착하는 증상)과 조울증 증상이 어린 시기부터 포착되며, 조증과 울증이 반복되는 가운데 조증 상태에서만 영감을 받거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고 추측한다. 조증 상태일 때 오는 과할 정도의 밝은 에너지를 곡을 쓰거나 사람들과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데 사용하고, 갑작스러운 우울증이 찾아오면 날이 새건 말건 사람들이 옆에 있던 말던 자신만의 세계에서 곡을 완성하는 극단적인 집중력이 그에게 수면 부족과 과한 체력 소모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요절에는 조울증이 크게 관여하였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그리고 앞선 시리즈에 설명한 <마술피리>와 같이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의 가장 큰 특징은 각 인물의 개성을 살린 음악이다. <마술피리>를 예로 들자면, 밤의 여왕은 맹렬하고 사나운 음색을 띄고, 공주 역할의 음악은 항상 유려하고 맑은 느낌을, 우스꽝스러운 조력자 역의 음악은 어딘가 장난스럽지만 사랑스러운 음색을 살려서 작곡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적 특징 역시 조울증으로 인한 정신분열이 가져다준 결과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우리야 완벽한 오페라를 얻었으니 뭐 크게 상관없지만)


물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재능은 '사람이 타고난 재능’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신이 그를 통해 우리에게 음악을 선사했다는 표현 말고는 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인생은 너무도 짧았다. 그가 35년 이후에 작곡했을 더 성숙한 작품들을 아쉬워하는 음악가들이 많다. 아니, 아마 모든 음악가들이 아쉬워할 것이다.


실제로 내가 음악을 전공하는 15년 동안 모든 선생님들께서는 모차르트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35년은 너무 짧았어. 몇 년만 더 살았더라도’라는 말씀들을 하셨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그를 음악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인생을 정리해본 결과, 그의 인생은 한 사람이 버티기에 35년이면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모차르트의 수많은 곡들은 19세기 식물학자이자 음악학자이던 ‘루드비히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에 의해서 정리된다. 그래서 본래 대부분의 작곡가는 작품번호를 뜻하는 ‘opus’를 줄인 말인 ‘Op.’로 작품번호를 뜻하는데 모차르트는 ‘쾨헬의 목록(Köchel Verzeichnis)’을 뜻하는 ‘K.’ 혹은 ‘Kv.’로 작품 번호를 표기한다.


이렇게 모차르트의 인생을 4편에 걸쳐 정리해보았다. <클래식 안내서> 시리즈를 모차르트로 시작한 이유는 그의 인생이 극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먼저 평가를 바꿔 놓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재능 넘치는 밝은 철부지로 보기에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파란만장했다. 그 당시 군주제에 반(反)하여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가장 진보적인 단체(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으며, 정치를 풍자하거나 서민들을 위한 작품들을 겁 없이 내놓기도 하고, 비록 경제적인 개념이 부족하여 많은 빚을 지긴 하였으나 그 빚을 갚기 위해 더 일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방탕한 과거를 등지고 누구보다 자신의 아내 콘스탄체를 사랑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만약 우리에게 모차르트처럼 노력이 필요 없을 정도의 재능이 생긴다면 우리는 그 삶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까? 그 재능 하나가 우리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까? 내 결론은 ‘아니오’다. 훌륭하고 위대한 음악과 별개로 모차르트의 인생은 음악에 잠식되어버렸다. 재능도 좋지만 결국 죽음의 앞에서는 ‘내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한 것’들이 남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지어본다.


다음 편에서는 모차르트의 대표 작품들과 간략한 음악적 지식들을 다룬 후에 모차르트와는 반대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베토벤’에 대해서 논해볼까 한다.


정말 베토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까?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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