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희 시인 Aug 09. 2023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詩

내가 사랑하는 시들 中 오늘 이 詩 한 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1941년~ )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2023년 8월 8일 오늘 나의 필사






2023년 8월 8일 화요일 밤에서 9일 새벽으로...


정말 오랜만에 필사를 한 것 같다.

브런치에 올린 마지막 필사가 작년 2022년 12월 14일 김영래 시인의 <밤의 경전>이었으니...

그간 브런치에 글 올리는데 참 게으르지 않았었나 싶다.  

벌써 2023년도가 절반 이상을 훌쩍 넘어섰건만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허탈감이 자리하는 것을 보니...

사실 올초 브런치에 올렸던 버킷리스트가 무색하게도 계획성 없이 하루하루를 산 것 같다.


올해 세 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었다가 여러모로 다른 신경 쓰이는 일들이 겹쳐서 차라리 쉬어가자는 마음으로 조금은 게으름을 피우고 내년을 기약했는데 운 좋게 지난 6월에 창작지원금을 받게 됐, 지원금을 받은 이상 올해를 넘길 수 없어서 당초 예정대로 시집 발간에 착수하게 됐다.


젊어서부터 늘 원고마감에 촉박하게 글을 쓰던 못된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6월, 7월을 다 보내고 드디어 8월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급하게 출판사 사장님과 통화를 했고, 어제부터 시집에 실을 시 취합이 시작됐다.

이제 8월 한 달, 당분간 다른 것들은  미루고  시집 발간을 위한 작업에만 몰두해야 할 것 같다.


그런고로 오랜만에 시인으로서 마음을 다잡으며 평소 내가 좋아하는 김광규 시인의 詩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필사했다.





추신.

이 詩가 유독 생각났던 2018년 초가을 밤, 그날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함께...

2018년 9월 14일 금요일 밤, 소설가 김현숙 선생님의 《히스의 언덕》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던 길에...


추신 2.


추신 3.


매거진의 이전글 시학(詩學) - 파블로 네루다 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