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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희 시인 Sep 24. 2023

푸른 도마의 전설 - 최대순 詩

내가 사랑하는 시들 中 오늘 이 詩 한 편...

푸른 도마의 전설

                        최대순(1961년~ )



횟집  뒷골목에 버려진 나무 도마 위로

빗방울이 가득 알을 슬고 있다

움푹 파여버린 뱃속은

얼마나 많은 물고기들을 떠나보냈을까

점차 흐려지고 있는 음화(陰畵) 그림 속으로

물고기 한 마리 파닥거리며 자신을 노출한다

나무에게로 와서 물고기로 살던 킬리피시*가

갈라진 나뭇결에 대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도마는 지느러미가 되어 긴 시간 품어 주었을 것이다

물고기들이 모두 떠나간 뒤에도 도마에게는

아직 버리지 못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덜컹대는 간판 아래 사내의 삶이 반 토막 났던 것처럼

그 사내의 몸에서 보고픔이 지독했던 것처럼

도마에게 비린내는 자신이 사랑한 것들의 향기였다

도마는 한쪽 밑둥치에서 썩고 있던 냄새를 맡고서야

자신이 거대한 나무였음을 기억해 내었다

그에겐 지워지지 않는 초록의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한때 자신에게 와서 부화되고 떠나간 새들이 있었다는 것을,

도마는 옆구리에 문신처럼 새겨진 물고기들을 지워본다

어느새 나타나는 나이테의 깊어진 울음,

달빛이 민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날에는

제 울음마저 토막 내었던 생각 때문에 온몸이 아려왔다

나무 위에서 도마가 자랐고 도마 위에서 물고기가 살았듯

모두 떠나간 몸뚱이에선 비린내가 그리움처럼 풍겼다

태양이 나뭇가지에 던져놓은 낚싯대가 팽팽한 여름

건기의 강가에서 살던 전설의 물고기가 뒷골목을 떠돌고 있다



- 최대순 시집 《푸른 도마의 전설》 中



*킬리피시: 열대에 사는 물고기로 호수가 없어지는 건기에는 흙이나 나뭇가지에 알을 낳고 우기에 부화되는 물고기





2023년 9월 24일 오늘 나의 필사






2023년 9월 26일 화요일, 가을비 내리는 아침에 다시...


내가 최대순 시인의 詩 <푸른 도마의 전설>을 좋아하게 된 까닭은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 나서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아니 어쩌면 애당초 잃어버린 추억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나무에게서 와서 한 마리의 물고기로 살다 간 킬리피시의 숨결이 근원도 모르게 쌓인 그리움을 마주하게 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이 詩가 참 좋은가보다.




추신.


추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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