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두껍게 내리는데 나는 막걸리를 서너 사발 이상을 마셔서 취하였고, 안양 중앙시장엔 비가 내리고 아직도 비가 잔뜩 도시를 집어삼키는 중이고, 젖은 채로 웅크린 도시는 며칠은 빳빳이 펴질 것 같지가 않고, 한때 잠시 사랑했던 이의 분신 같던 이른 봄 홀로 먼저 핀 진달래 꽃잎 같던 이제는 모퉁이가 나간 힘없는 우산 탓이었는지 아님 받쳐든 손 보다 빠른 보폭이 낡은 분홍 처마에서 내린 빗물을 지나버린 사랑의 쓸쓸함을 오롯이 다 받아낸 것인지 내 신발은 발등까지 온통 젖어서 이미 발의 감각은 무뎌지고, 겨울에 눈이 아닌 비가 오는 것은 내게 하얀 낭만에 대한 운치를 빼앗아버리는 만행 같고,
우리는 사방이 뻥 뚫린 지나는 시장 손님들과 붙박이 시장 상인들이 보는 무대 한 복판에서 릴케를, 백석을, 형도를, 하루키를, 쉼보르스카를, 그리고 이제는 실망이 더해져 애정이 식어버렸다는 울프를 얘기하고 있었지. 젖은 시장통 투명 포장마차에 앉아 갑자기 켜진 조명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새로이 시의 지원금을 받아 비까 번쩍한 호텔 같은 조명을 달게 됐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의미도 담지 않고 생각보다 길어진 해를 이야기했지.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거리를 바라보며 그래도 곧 봄이 올 거라는 그래서 생각보다 길어진 해가 당연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아마도 더 이상 눈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단골 포장마차 할머니의 근거리 과거를 자꾸 잊어버리는 슬픈 병을 앓게 된 사연에 다시는 그분을 볼 수 없을 당신과 나의 미래를 생각했지. 그러면서 나는 한 번쯤 더 뵀으면 하는 아쉬움 정도를 당신의 내색하지 않는 더 깊은 쓸쓸함을 말하지 않고 생각만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