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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l 22. 2021

"1991년, 푸르렀던 5월 (4/6)"

Jeanhe 와의 이야기

지금도 그렇지만, 한 차에 여성과 같이 작은 공간을 같이 한다는 의미는 특별합니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겠고, 이런 기회를 통해 음흉한(?) 목적을 내심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제게는 어리석게도(?) 넓고 넓은 우주공간 수많은 별들 중 이 태양계라는 구성에 속하는 지구에서, 그래도 60억이 넘는 사람들 중 어느 한 곳에서 어느 한 사람과 어느 작은 공간을 같이 공유한다는 사실이 참 소중합니다. 아마 이때, 1991년 봄에 경험한 이 소중함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날은 많은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차를 두 번 했고, 그날 밤엔 당시엔 매우 비쌌던 크롬 공테이프에 그녀가 좋아할 만한 노래들을 더빙하고 녹음하느라 자정이 넘도록 열중했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 30분의 드라이빙을 위해.



그 날 오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지금 이 세상에 없기에 그녀와의 모든 추억이 그 어느 추억보다 소중하지만, 20년도 넘게 오래된 일이며,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SNS 가 없었던, 그처 종이에 적어 접은 후 전해주던 쪽지와, 직사각형 모양의 10달러짜리 카메라가 추억을 기록할 수 있는 도구였으니 아쉽기만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확실히 남아있는 그 따스했던 봄날 아침의 기억은 - Bayside Avenue 에 만발했던 다양한 봄꽃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새파란 전나무들 사이사이로 보이던 밝은 햇살,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Jeanhe 의 긴 검은색 머리카락을 날리던 모습, 어떤 향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 바람결에 맡았던 참 좋았던 향, 그리고 새들이 지저귀던 소리는 아직까지도 눈 앞에 선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간혹 어느 봄 날 그때와 비슷한 햇살이 비치는 날 잘 정돈된 어느 골프코스의 입구로 이어지는 매우 한적한 길을 운전하다 보면 그때가 기억에 나며 그녀가 제 옆에 있는 듯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이야기는 1991년 6월 졸업식이 지나고 계속되었습니다. 졸업식 때 그녀는 제게 "Don't ever change, you are a sweet person" 이란 메시지와, 영어로 "졸업식 파티에 같이 못 가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모든 것을 다 가질 순 없잖아?"라는 메시지 또한 적어주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정신연령에 있어 몇 년 이상 성숙하다는 속설이 맞기는 한가 봅니다.


졸업식 이후 우리는 그리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러 준비에 거기에 파트타임 일을 우리 둘 다 하고 있었기에. 그래도 기회가 되면 맨해튼 여기저기에서 만날 구실을 찾아 서로의 얼굴을 보곤 했습니다. 이렇게나마 같이 한 그 많은 여름날들이 지나고 8월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Boston 에 있는 대학교로, 저는 맨해튼에 있는 대학교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날, 그녀는 저와 같이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로 한 번 다시 가 보자고 하더군요.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주차를 조금 멀리 한 후 학교로 걸어갔습니다. 8월 17일, 그녀의 생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우리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날이며, 그녀가 제게 한 장의 흑백사진을 준 날이기도 합니다.


정문 앞 계단에 앉은 우리는 더운 여름날의 바람을 그저 아무 말 없이 즐기고 있었고, 잠시 후 그녀가 가방에서 그녀의 모습이 담긴 작은 흑백사진 한 장을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I want you to keep this, and I want you to remember me."


긴 머리,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청바지로 기억되는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있던 그 사진 - 봄에 친구들과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녀는 제 손을 잡아주었고, 저도 그 손을 꼭 잡아주었습니다. 이 사진... 이제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고 나중에 그녀에게 다시 돌려주었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의 20대는 시작되어가고 있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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