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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ug 28. 2021

"Chanel No. 5 (6/7)"

결혼을 생각했던 한 사람과의 추억

(5/7 편에서 계속)


"네, 말씀하실 게 있어서 전화하셨으니, 하시지요."


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는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하기에,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일 듯 하다는 생각도 한 켠에는 있었지요.


"아영이와 나는 선생님이 이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이미 선약된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소 격양된 목소리였습니다. 나름대로는 감정을 억누르고 절제하면서 하는 말투였지요.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행여 미안하다는 말을 나로부터 들을 생각이셨다면 오산입니다. 그쪽이 만약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했으면 나 또한 같은 입장이니, 개싸움은 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겠지만 지금 상황까지 이르게 한 정도로 무책임한 사람이니 싸울 가치가 없을 듯 하니까요. 한 사람이 양쪽을 기만했다면 그런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아야 함이 맞겠지요? 그쪽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아, 이봐요!"


"전화를 건 것도 그쪽이고, 지금까지 계속 일방적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투는 뭡니까? 지금 그쪽이 얼마나 추하게 들리는지 아십니까? 그만합시다. 그리고 그 사람, 나중에 나한테 해명해야 할 일 남았다고 전하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저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사실 이 남자와 전화통화를 하던 내내 그의 목소리 너머로는 아영이의 우는 소리와 함께 그 사람에게 소리치는 소리가 내내 들렸습니다. 아영이가 자신의 전화를 뺏으려고 남자의 팔을 자꾸 세게 당기는 듯 이 남자의 목소리도 많이 끊어지곤 했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음은 확실했으나, 아마도 이 남자가 자기가 바라는 대로만 각본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일 듯도 했지만, 그때는 귀찮고 기분이 더러웠지요. 예전 이문열 씨의 소설 어딘가에서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다투는 것을 개싸움이라고 비유한 것도 떠오르더군요.


흔하지 않은 애틋한 마음은 확실히 느꼈는데, 함께 같은 시간과 장소를 많이 공유했는데, 사랑일지는 그때까지는 확실히 몰랐지만 그래도 어떤 미래를 상상 속에서 만들어가던 상대였는데 - 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의미 있었던 순간들도 떠오르더군요. 2004년에 회사를 이전하느라 늦은 밤까지 테헤란로에 있는 빌딩에서 직원들과 9시 너머까지 일을 하던 때 아영이가 전화를 하고 저를 찾아왔던 그날 밤, 우린 POSCO 빌딩 뒤편 어딘가에 있던 Italian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했었지요.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데려다주던 길, 그리고 아영이가 차에서 내린 후 "안녕" 하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을 때 저 또한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달려가서 그녀의 등 뒤에서 안아주었던 기억, 그리고 "아..." 하며 조그만 소리로 탄성을 지르던 그녀의 숨소리까지 기억에 떠오르더군요. 


소중한 추억들이 꽤 많았던 우리였지만, 더 이상 어떤 것을 해 볼 수는 없었고, 할 의지도 없었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삶 속에 들여놓기엔 그 당시엔 너무나 여유가 없이 바빴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5년에 아영이를 기억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 후 2년지 지난 2007년 겨울, 제가 35살이었던 해 꽤나 추웠던 겨울, 거의 2년 만에 아영이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문자 인사 및 대화였지요. 2007년 겨울, 아직까지 쓰고 있던 그녀 명의의 전화번호로 아영이의 문자가 2년 만에 들어오면서 우리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의 첫 만남, 그리고 2005년 이별, 그리고 2년 후인 2007년 다시 보게 된 우리였습니다.


아영: 정원씨 안녕하세요.

.

.

정원: 네, 안녕하세요.

아영: ...

정원: 잘 지내지요?

아영: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별일 없으셨죠? 좋은 소식은 없고요?

정원: 일복만 있다는 거 외엔 없어요. 결혼 소식은?

아영: 한동안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소식을 전해주지 못했군요.

정원: ...

아영: 저 결혼했어요~ 2005년에.

정원: 그랬겠지요. 축하합니다.

아영: 감사해요. 미안하고요.

정원: ...

아영: 드디어 아줌마가 되었죠..ㅎㅎㅎㅎㅎ

정원: 청첩장 보내시지.

아영: 미안하기도 했고, 제가 그때 일이 많았어요.. 결혼도 급히 하느라..

정원: ...

아영: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ㅠ.ㅠ

정원: 아버지 가시기 전에 결혼하셨구나...

아영: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느라.. 매우 매우 급히 했죠..

정원: 보시고 떠나셨나요?

아영: 네. 그때 그 남자, 아버지가 저하고 결혼하라고 정해주신 사람이었어요.

정원: ...

아영: 그 때 나는 사랑이라고는 생각 안 했어요, 그 사람에 대해.

정원: ...

아영: 결혼을 해서 지금 고백하지만, 저 정원씨 많이 좋아했어요.

정원: 네, 알아요. 나도 그랬으니까.

아영: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 듯해요.

정원: 아닙니다. 그런 위로는 필요 없어요.

아영: 위로 아니어요... 후회해요.

정원: ...


이렇게 오해가 풀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과 아영이가 이때 해준 말을 같이 엮어보니 지금에 와서 사실이 아닌 말들을 할 이유도 없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화가 났었던 일들을 포함해서 마음을 털어놓으니 이후에는 대화가 즐거워졌지요. 그녀가 후회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어지는 대화에 이런 생각도 묻혀버리더군요.


아영: 전 항상 그때 정원씨밖에 기억에 안 나는데~

아영: 늙는다니 흑흑.. 서글프다... 나도 같이 늙어가는 거 같아서..ㅠ.ㅠ

정원: 으흑. 2003년이니까, 31살...

정원: 아영씨는 27

아영: ㅎㅎㅎ 맞아요. 그때는 젊었는데~


그 후 한 시간 정도를 더 이야기를 한 우리,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도 잊은 듯, 그리고 당시 저도 다른 사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잊은 채 우린 2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2005년의 급작스런 헤어짐의 충격은 여전히 남아있었나봅니다. 아영이가 점심 또는 짧은 커피모임을 하지는 제안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먼저 연락을 제가 하지도 않았지요. 결혼을 한 사람이라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예전의 그런 감정은 마음 속에 없어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의 공백이 반 년쯤 지난 어느 봄날 이른 새벽, 아영이로부터 이런 문자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아영: 정원씨... 보고싶어... 나 지금 현실이 너무 싫어.


마음이 조금은 움직였습니다. 마음속에서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는 상상을 했지만 머리속 이성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더군요. 답을 하지 않았기에, 아마도 그녀도 더 이상의 말은 더해주지 않더군요. 아련한 마음에 새벽시간을 뜬 눈으로 지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다음날은 LG 텔레콤으로 가서 전화를 해지하였습니다. 그 때 까지 가지고 있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봄이 지나 6월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업무가 정리가 되어 출국을 하게 되었고, 한국에는 1년여동안 돌아오지 않았지요. 아영이도 그날 새벽 이후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또 긴 시간의 공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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