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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ug 26. 2021

"Chanel No. 5 (5/7)"

결혼을 생각했던 한 사람과의 추억

(4/7) 의 다음편:


아영이 명의로 된 전화 덕에 최소한 몇 개월 또는 한 두해는 진전된 듯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려울 듯 하던 연락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지요. 주중에는 문자로, 그리고 주중이라도 여의도 근처에 갈 때면 문자를 보내서 단 5분이라도 차 안에서 제가 미리 사온 커피와 빵을 같이 나누곤 했습니다. 아영이는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는 것을 선호했었습니다. 차 안에서는 제가 앉아있는 위치에서는 시선이 아래로 향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그걸 보고 아영이는 가끔 "내 다리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정원씨? 원래 이렇게 은근하게 묘한 실루엣이 더 끌리지 않아요?"라고 짖굿은 농담도 자주 했습니다. 매번 그럴때마다 제 얼굴은 조금 붉어졌고, 그걸 보고 아영이는 히히히 - 웃으며 재미있어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이 사람의 다리를 보고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지요.


한번은 어느 눈이 내리던 주말에 그녀의 회사 lobby 에서 만나서 근처 아무도 없는 커피샵이나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직장인들이 많은 지역의 경우 주말엔 사람이 아예 없는 장소들이 많았었기에, 그런 장소들을 우리가 만나는 곳으로 즐겨 찾았었지요. 그녀는 언제나 밍크, 또는 그와 비슷한 것들이 달린 옷들을 좋아했습니다. 검정색 코트에 흰색 블라우스나 니트로, 그리고 주말엔 주로 긴 치마로 - 흰색 또는 아비보리 색 - 옷을 입고 저와 함께 다녔습니다. 한없이 걷기도 했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요. The Ritz Carlton 에도 자주 갔던 기억이 납니다. 큰 호텔이지만 이곳 저곳 사람들의 시선이 가지 않는 숨은 보석같은 장소들이 많은 곳이었지요.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은밀한 일을 그곳에서 한 것이 아닌, 그저 조용한 장소가 필요했던 우리였습니다. 사실 아영이와 저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세 번 손잡은 경험과 한 번 안아본 것이 전부였군요.


어느 날 토요일 오후에는 이런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영이와 1시간 30분 남짓의 시간동안 점심을 하면서, 이 사람은 참 명랑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계속 여러가지 주제로 말을 했고,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이, 누군가가 오랜 시간동안 말을 계속하는 것을 듣다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소음처럼 들리게 되는데, 이 친구는 그리 들리지 않더군요. 제스쳐도 많지 않고 찬찬히 말을 엮어내는듯한 것을 듣고 있으니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대화 중 그녀를 보니 화장도 그리 잘 하는 여성은 아니라는 점과 (예전 누군가가 떠오르더군요), 그녀 주변의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전체적인 치장에도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길었던 오늘 점심은 전혀 부담되지 않고 불편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편안함을 주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은데, 이런 사람이라면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삶을 같이 해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영이를 마주하면서 처음 든 이 생각과 더불어 1994년 Pulp Fiction 의 Mia Wallace 의 대사가 떠오르던 것도 기억합니다: "Uncomfortable silences. Why do we feel it’s necessary to yak about bullshit in order to be comfortable?”



이렇게 2년여동안 한국에 다시 올 때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소소한 연애를 해 오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주중 오후였는데 교육과정이 있는지 - 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네, 아영씨."

"아, 안녕하세요. O정원씨 전화지요?"

"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지요?"

"아영이 옆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류의 전화, 처음이었지요. 원래 잘 놀라지 않기에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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