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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Mar 31. 2016

"31곳의 식당과 24곳의 커피샾 (3)"

첫 번째 식당

윤주가 일하는 회사는 남대문에 있었습니다. 퇴근길에 같이 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응한 그녀는, 눈이 나리는 12월의 오후 6시에 대한상공회의소 앞에 서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서 있던 그녀의 모습 - 아이보리 색의 반 코트 위로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진 긴 검은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 반 코트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긴 다리 - 은 제게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Bonsoir (프랑스어로 "굿 이브닝")"라고 하며 그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제 차 앞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바람이 좀 불던 날이라 눈발이 차 안에까지 들어왔고, 약간은 매섭게 찬 바람이 제 코 끝에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과 함께 그녀의 향수 향까지 같이 그 바람에 실려 제 기분을 약간 들뜨게 만들었지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어요,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남대문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원씨는 피곤해 보여요."


"그렇게 보여요? 윤주씨랑 약속이 있어서 오후엔 일을 일부러 피했어요. 어쩌지?"


"괜찮아요, 제가 아주 맛있는 음식을 하는 곳으로 안내할게요."


"이런, 제가 청담동에 Pani라는 곳에 예약을 했는데, 오늘은 제 약속 장소로 가요."


"아, 그러셨구나. 그래도 오늘은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요. 그 사람들은 우리 없어도 자리 채울 수 있을 거니까."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파묻히듯이 좌석에 깊이 앉았습니다. 아무래도 추운 날, 오래 서 있어서 몸이 풀리는 듯 했습니다. 그때 제가 타고 다니던 차가 뒷좌석이 매우 편한 차라, 윤주에게 30분 만이라도 뒷좌석에서 눈이라도 붙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정원씨가 그럼 제 운전기사가 되어 주시는 거네요? 호호."


차를 옆에 대니 그녀는 뒷좌석으로 옮겨 탔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동승할 때를 준비하여 여러 음악을 준비하는 습관이 있어서, 이 날도 프랑스 노래가 담긴 CD를 틀었습니다. "Plaisir d'amour"라는 Nana Mouskouri 의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물론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노래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잠시 창 밖을 응시하던 그녀는 조용히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Plaisir d'amour ne dure qu'un moment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이라네


Chagrin d'amour dure toute la vie

하지만 사랑의 아픔은 영원하다네

Tu m'as quittée pour la belle Sylvie

당신은 실비아에게로 나를 버리고 떠났고


Elle te quitte pour un autre amant

그녀는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당신을 떠나겠지요...


Nana Mouskouri 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그 눈 오는 밤에 듣게 된 윤주의 프랑스어 노래는 꿈결과도 같았습니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해도 손색없는 그녀는, 한 절이 끝나면 바로 한국어로, 그리고 영어로 제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절과 절 사이가 매우 짧아 그 또한 어려운 일이었지만, 속삭이면서 매우 빠르게 제게 말해주었지요. 아, 그 날의 기억은 마치 The Umbrellas of Cherbourg (1964)의 마지막 장면처럼 아름다왔습니다. 그 날 저녁만은 한국의 서울이 아닌, 프랑스의 파리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요.


노래가 끝날 무렵 그녀는 잠에 들었습니다. 후방 거울로 보니 그녀의 아이보리 코트 속에 얼굴이 반 이상 가려진 채로 조용히 하지만 들을 수 있는 숨소리로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천천히 남산 2호 터널을 지나 그녀가 살고 있는 대치동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리 저녁 약속이었지만 그녀가 너무 피곤하게 잠을 자고 있어서 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지요.


삼성동 COEX를 지날 때엔 이미 눈이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잠에서 깨었지요.


"아, 미안해요... 차가 너무 편해서 잠에 빠져버렸네요. 어디여요?"

"삼성동이어요. 오늘은 그냥 집에 가요. 피곤해 보여요."


"아니어요! 제가 가고 싶은 곳에서 멀지 않네요. 은마아파트 알지요? 정원씨 할머니께서 예전에 사셨다는?


"네. 거긴 왜요?"


"거기 상가로 가요. 맛있는 식당 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그렇게 하여 우리가 찾았던 31개의 식당 중 첫 번째 식당이 은마아파트 지하상가 떡볶이 집이었습니다. 아직도 시간이 되면 일부러 가서 같은 자리에 앉아 떡볶이를 주문해서 먹는 습관은 아마 이때부터 시작된 듯 합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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