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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Apr 04. 2016

"31곳의 식당과 24곳의 커피샾 (4)"

2007년 겨울

지금은 많이 또는 자주 그렇지는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만남이거나 나름대로 소중한 사람과의 모임은 꼭 비싸고 독특한 곳에서 해 왔습니다. 제 허세를 부림이 아닌, 상대가 제게 소중하다는 것을 때로는 말로 또는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 할 경우가 많고, 가까운 사람이 아닐 경우엔 더욱이 그러하다는 생각에 그리 하였고, 윤주의 경우도 또한 그 경우였지요. 하지만 그녀는 저와의 첫 식사를 은마아파트 지하상가 떡볶이집으로 이미 결정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와 비교하면 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나중에 더 잘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참 솔직하고 자유로운, 그리고 타인의 시선이나 관점에 그녀의 삶의 방향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랬기에 주변에서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지하상가의 어느 한 가게에 주저하지 않고 걸어간 그녀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주머니에게 "오늘은 좀 일찍 왔어요. 많이 파셨어요?" 하고 환히 웃으며 그녀는 가게 주인아주머니에게 인사했고, 5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마치 딸에게 하듯이 말 대신 미소를 크게 지어주더군요.


"자주 오는 곳인가 봐요? 일찍 왔다면, 밤에 자주 와요?"


"네, 가게 문 닫기 전에 가끔 와서 이것저것 사가지고 집에 가요."


"야식을 좋아하시는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말랐어요? 좋겠네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윤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겁게 먹지만, 저는 기분이 상하는 날 먹어요. 오늘도 그럴 것 같아..."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시간이 조금 지난 몇 달 후에 알게 되었지만, 저는 그저 그녀가 음식으로 화를 푸는가 보다 하며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윤주와 저는 그 날 떡볶이를 서로의 입에 넣어준다거나 아니면 살뜰한 농담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의 대화가 없었지요. 그녀는 지난봄 어느 날 공원에서 그랬듯이, 떡볶이마저 입 안에서 꼭꼭 씹으며, 완전히 씹어 넘기기 전에는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않고, 하지만 웃는 얼굴로 이곳저곳을 바라보며 또는 응시하며, 때로는 제 얼굴을 보고 조금 더 웃어주며 그녀가 주문한 한 접시와 어묵 작은 그릇 하나를 깔끔히도 먹었습니다. 거의 40분이 걸렸었던 그 날의 기억... 저는 어느 정도는 그녀의 속도에 맞추다가 그저 습관대로 20분 정도에 다 먹었고, 남은 시간은 그냥 그녀를 쳐다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 주며 남은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절대 지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기억입니다.


"저, 뉴욕에 있었다고 말씀드렸지요?"


"네, 2년 정도 공부했다고 예전에 말했어요."


"다시 가고 싶어요, 공부하러. 학위를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닌, 저를 위해."


"어떤 관심이 있어서 그래요?"


"미술 역사를 해 보고 싶어요. 인문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가운데서도 미술은 인류가 각각의 시대를 살며 그 당시의 삶을 표현해낸 가장 정직한 방식이었고, 미술 역사를 공부하면 그들의 삶, 아니,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왔나에 대해 깊이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앞으로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지 배울 수 있을 듯해요."


"하지만 미술작품들이 정직하지만은 않았잖아요? 중세미술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다양한 사회계층 가운데 극히 일부분의 삶을 대변한 것이 중세미술이었고, 고대 미술의 경우에는 그 흔적조차 미미하니, 결국 현대를 사는 역사학자들의 견해를 통해 추정만 할 뿐, 정확하지는 않다고 봐요"


"그래서 흥미로울 듯해요. 여러 도서관 또는 유적지를 방문해서 관련 자료를 보고 읽고, 그리고 이를 반복하고 깊이 파고드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주관적인 결과물이 나올 듯해요. 그걸 객관적인 결과물과 비교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가 찾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린 만날 때마다 이런 류의 대화를 했습니다. 깔끔하게 먹어치운 두 개의 떡볶이 접시와 어묵 그릇 둘을 앞에 두고, 그리고 가게 정리를 하시는 50대 아주머니를 옆에 두고 이런 대화로 우리의 특별한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기엔 많이 부담스러운 고급 식당이나 또는 손님의 취향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시끄러운 커피샾을 피해 우리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식당 또는 카페를 그 날 이후 자연스럽게 찾게 되었고, 우리의 이상한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 앞까지 바래다주었습니다. 상가에서 나오니 눈이 더 내리고 있었고, 그녀는 제게 "같이 걸어가요."라고 하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제 오른쪽에 서서 나란히 걷던 윤주, 윤주의 왼손이 제 오른팔을 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약간 놀라 그녀의 얼굴을 보니 윤주는 그저 앞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술엔 미소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오른쪽 어깨에 그녀의 머리를 기댔습니다.


"이렇게 하면... 연애하는 모습이네요, 우리?"


서로를 보고 약간은 어색하게 웃었고, 우리는 곧 그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털어주었고,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습니다.


2007년 겨울은 그렇게 따뜻하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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