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곳의 식당과 1곳의 커피샾을 남겨두고
한국에서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는 않은 윤주, 하지만 그녀는 회사에서는 매우 유능한 사원이었습니다. 외국계 회사에서 4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한다는 장점은 그녀의 업무능력에 더하여 그녀를 다른 동료들보다 빛나게 했지요. 미국 고객사 임원들, 일본 파트너 회사 임원들, 그리고 프랑스인 매니지먼트가 방문할 때마다 여러 회의에 참석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무척이나 밝았으며 역동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의 윤주도 퇴근시간에는 또 다른 모습을 제게 자주 보이곤 했습니다. 집에 가기를 기피하는 십대 소녀 같은 모습은 절대 아니었으나, 멋진 5월의 축제에서 친구들과 흥겨운 하루를 보낸 후 다시 불이 꺼진 놀이기구들과 어두운 하늘을 뒤로 하며 쓸쓸히 집으로 걸어가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런 날일수록 그녀는 저와의 저녁시간에 유달리 말이 많았었습니다.
"오늘은 영어로 해도 되지요, 정원씨? 정원씨도 그게 편하니까... 그렇죠?"
"그래요. 나도 요즘엔 한국어로만 주로 대화를 해서 영어가 그리워져요."
또 어느 날은 윤주는 프랑스어를 하고 싶어 했는데, 제가 프랑스어는 전혀 모르기에 이런 날은 참 난처했습니다. 그래도 그녀의 프랑스어는 어느 예전 영화에서 본 그 멋진 발음보다도 더 듣기 좋은, 마치 음악 같았지요. 일본어를 하고 싶어 할 때도 저는 비슷한 느낌이었지요. 이렇게 철없는 아이처럼 5분 정도를 혼잣말처럼 말한 후, 미안한지 그녀는 제게 코를 찡긋하며 "힝!" 하고 웃어주었던 기억도 지금도 선명합니다.
2008년은 제게 매우 바쁜 해였습니다. 금융위기가 전 세계에 몰아친 해였고, 그 전 해인 2007년보다 더 깊은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밤낮으로 저는 정신없이 지냈고, 우리의 저녁시간을 통한 만남은 30곳의 식당과 23번의 커피샾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겠지요? 저도 윤주가 일하는 고객사에 신경을 덜 쓰게 되고, 야간에는 뉴욕 업무로 인해 1년째 시간을 낼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많이 걱정되었는데, 일상의 평안함이 없는 그녀의 삶에 제가 그나마 해 줄 수 있었던 일이 저녁시간을 통한 동행이었는데, 이를 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아쉬웠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윤주가 있는 고객사를 방문하던 중, 그녀와 어느 남자가 같이 점심을 하러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사로운 습관과 눈빛을 이미 오랫동안 알고 있었기에, 그 남자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와 걸어나가던 중 저를 보게 된 윤주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 표정 그대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습니다. 처음부터 연인은 아니라는 무언의 동의 하에 동행이 되어 주었던 저였지만 아쉬움과 서운함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사 담당자와 회의를 마친 후 주차장으로 가던 길... 윤주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요즘 괜찮아요? 바빠서 연락을 너무 못했어요."
"바쁘시리라 했어요. 금융계 전체가 계속 그랬잖아요, 1년이 넘게..."
"그래도 미안한걸요?" 하고 저는 그녀를 보고 웃었습니다.
"지금... 시간 있으세요?"
회사 옆에 있는 cafe에서 윤주는 그녀의 삶에 생긴 변화에 대해 제게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가능한 한 한국을 떠나고 싶던 그녀... 같은 회사 직원 중 프랑스 본사에 근무하던 프랑스 교포 한 명을 알게 되어 가까워졌다는 그녀, 그리고 곧 약혼을 한 후 프랑스로 이직하여 결혼식을 그곳에서 할 예정이라는 소식까지.
저는 진심으로 윤주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제 마음에 질투심이나 조금이나마 분노의 불씨도 생기지 않았음이 이를 대변할 수 있었던 듯 합니다. 한 달 후 떠나게 되었다는 그녀, 2008년 12월로 접어들던 겨울의 일이었습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