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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Feb 15. 2022

"외국인의 Déjà Vu"

지나가는 생각들


2006년 영화 Déjà Vu를 좋아합니다. 특히 위 장면에서 보인 Denzel의 눈빛,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Claire (Paula Patton)와 Doug (Denzel Washington) 이 차를 타고 가면서 보인 Claire의 눈빛이 너무나도 아련하고 또한 아름다웠기 때문이지요. 사실 Déjà Vu를 실제로 겪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인디아의 Hinduism에서 유래한 karma 또는 개신교의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믿음이 - 사실 Déjà Vu라고 볼 수는 없지만 - 오늘의 경험을 통해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6년 - 뉴욕의 Chase Manhattan 은행의 어느 지점에서 근무를 하던 때였습니다. 지점장 바로 아래 직위에 있었고 supervisory 임무였지요. 천천히 흘러가던 어느 여름날 오후, 꽤 마른 체형의 동양인 남자 한 명이 지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의 옆에는 어느 여자가 동행하고 있었지요. 둘 다 제 나이 또래로, 20대 중반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왠지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의심스러워서 눈에 띈 이 남자는 한쪽에 있던 counter에서 필요한 용지를 작성한 후 줄을 서더군요. 순서가 오자 Tara라는 teller의 window 앞에 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별 다른 일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제 데스크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 Tara의 높아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흑인인 데다가 다혈질인 Tara는 평소 동양인 고객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던 차, 또 무슨 일로 지나치게 반응을 하는지 확인하고자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은행 floor로 걸어갔습니다. 아까 그 동양계 남자와 Tara는 "내가 그 사람이니까 해 달라, " 그리고 "규정상 안 된다"라고 다소 그리고 점점 더 높아지는 목소리로 서로에게 반복되는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알아보니 남자의 이름은 동양사람의 이름이 아닌, 백인의 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는 ID는 그의 사진과 이름이 제대로 박혀있는, 원본 ID 였습니다. 하지만 Tara의 눈에는 이 동양계 남자가 백인 성을 가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고, 이 두 사람이 은행의 규정에 맞는 타협점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지요.


잠시 이 상황을 보다가 어떤 생각이 들어 이 동양계 고객에게 제 책상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조금은 의아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Tara를 뒤로 하고, 저와 이 사람은 제 책상으로 왔습니다. 자리에 앉게 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Sir, I am sure you know why she cannot process your request."

"Yes, I understand, but trust me, this is me, and I just want to cash my check."


자신에게 발행된 수표 $5,000를 현금화하기 위해 지점에 들어온 이 사람 - 수표를 현금화할 시 특정 금액이 넘는 경우 규정에 따라 ID와 추가 ID를 제시해야 했고, 그는 이에 2장의 ID를 Tara에게 제시했지만 Tara는 이를 확인한 후에도 그의 얼굴과 ID에 표시된 이름이 상식적으로도 매칭이 되지 않기에, 이를 한 종류의 사기로 보고 수표를 현금화해 줄 수 없다는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전에 보여준 그의 어색한 행동, 그리고 그의 불안정한 눈빛을 생각해보니, 이 사람이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어떤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본 질문 하나:


"I am sorry for asking this, but are you of Korean heritage?"


5초쯤 지난 후 돌아온 그의 답은 이랬습니다:


"I was adopted when I was 2 years old, and yes, I am from Korea." 

 

더 물어볼 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행 규정상 고객확인 순서를 제가 직접 한 차례 더 진행한 후, 부지점장의 권한으로 그 5 천불짜리 수표를 현금화해도 좋다는 제 서명과 도장을 수표 뒷면에 날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를 Tara에게 보냈지요. 그 후 Tara의 어떻게 표현할 수 없던 표정과, 동시에 수표를 현금화한 후 지점을 걸어 나가면서 제게 던진 그 한국계 입양인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에 납니다. 수표가 진짜인지 아닌지 공식적으로 확인이 되는 3일간은 조금 걱정도 있었지만, 결국 그 수표는 진짜였고, 그 수표를 제시한 그 한국계 양인도 사기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니, 마음속에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이 한국계 입양인은 미국인으로 살면서도 외국인 같은 삶을 살고 있고, 내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이미 여러 차례 겪었을지도 모를 씁쓸한 경험을 또 했겠구나 - 하는 생각을 하니 참 착잡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22년 - 경기도 어느 동사무소, 저는 전입세대 열람원이라는 서류를 떼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제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가 소유주임에도 이 서류를 뗄 수 없고, 한국인 대리인을 데려와야 한다는 대한민국의 어처구니없는 규정을, 제 앞 유리창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 공무원은 제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더군요. 이 사람은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있던지 처음부터 퉁명스러운 말투와 눈초리가 거슬렸고, 결국은 말도 안 돠는 규정만 들이대며 다음 번호를 부르기까지 하다군요. 집주인이 전입세대 열람원을 뗄 수 없다는 규정과 같이 제가 한국에 살면서 경험한 어처구니는 수백 번도 넘지만, 여기에 더해 무례함까지 더해진 경우는 최근 갑자기 늘긴 했지만 아직은 심히 불쾌할 정도로는 많지 않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걸어 나오던 길,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다시 그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관리자 또는 다른 사람에게 설명을 하면 혹시 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에 전화를 했지요. 어느 여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고, 저는 자초지종을 찬찬히 이야기한 후, 집주인이 외국인이라 전입세대 열람원을 뗄 수 없다는 규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 불평을 듣고 있던 이 직원은 잠시 후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라고 제게 물었고, 저는 아직 주차장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직원은 "제가 잠시 나갈 테니 기다려주세요."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어느 여직원이 정문에 나타났고, 저를 알아본 이 직원은 저를 다시 동사무소로 들어가자고 한 후 자신이 대리인으로 해서 서류작성을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누구나 대리인은 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이미 저와 그 남자 직원의 대화를 뒤에서 다 들었다고 하며, 미안하다고,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그리고 직접 서류를 작성해주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그녀는 제가 필요한 그 서류를 3분도 안 되어 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남자 직원은 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지요 - 아마도 그의 상사인 듯한 이 여직원은 그저 제게 해 줄 일을 하고 깍듯이 인사를 한 후 저 뒤편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생각 한 결의 차이였음을, 공무원은 민원인의 요청을 최대한 법의 한도에서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그 남자 직원은 망각하고 일을 하고 있는 직업인이었을 뿐,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이 여자 직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을 아주 감동적인 모습으로 해 준 훌륭한 공무원의 인상을 제게 심어주었지요. 내일은 시간이 되면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녀에게 선물을 주고자 합니다.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다운 사람이니까요.




Déjà Vu 까지는 아니나, 26년 전 뉴욕의 한 지점에서의 일과 오늘의 일이 묘하게 교차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배역과 역할은 모두 뒤죽박죽으로 바뀌었으나, 그 각각의 경험이 준 감동은 그대로더군요. 이렇게 삶은 또 묘한 순간을 선사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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