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생각들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에서 이지안과 박동훈의 대화입니다. 당시 여론에서 떠들던 불륜 드라마라는 등의 악평을 이 대화가 깨끗하게 씻어내 준 듯합니다:
저 부산으로 가요. 회장님이 거기 있는 회사 소개시켜 주셨어요. 절친이 하시는 회사래요. 숙소도 좋대요.
왜 그렇게 멀리 갔어.
생각만 해도 그지같잖아요.
아저씨 한 번 볼까 싶어서
이 동네 배회하고 다니는 거
죽었다 깨어나도 행복할거라면서요
나 없이도 행복할 사람
무슨 매력 있다고.
딴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나를 아는 사람들
한 명도 없는 데로 가서
과거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참 아름다운 대화지요. 더러운 것들로 점점 더 채워지는 현실에서 어느 한 사람을 "그저 한 번 보고 싶어" 어느 동네를 배회하는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가 아직까지도 나올 수 있는 한국입니다.
이 대화 중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와닿더군요: "딴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어요. 나를 아는 사람들 한 명도 없는 데로 가서 과거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어찌 보면 지난 2000년대 초반, 단기간으로 체류할 예정이었던 한국에 오래 있게 된 이유, 그리고 예상하지 않게 오래 머무르게 된 한국에서 더 자주 뉴욕으로 발길을 돌린 후 이제는 다시 이곳에 다시 머물게 된 이유가 이 "이지아"라는 캐릭터의 대사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곳 뉴욕에는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국과 다른 점은 몇 사람 건너면 모두 다 알게 되는 좁은 범위가 아닌 광범위한 인간관계입니다. 인종적 다양함과 social layer 가 다양하고 깊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하겠지요 (다만 한인사회는 너무 좁은 듯합니다). 아름다운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갈 때마다 즐거워지는 장소가 많기도 하지만, 가능하다면 지우고 싶은 과거의 부끄러운 부분도 이곳에 아직 그 어두운 기운을 내뿜으며 가끔 괴롭히기도 합니다. 한국에도 마찬가지지요 - 사랑의 추억들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과 장소가 그때의 설렘과 행복을 그대로 머금고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반면, 피하고 싶은 사람들과 장소들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만큼이겠지요 - 좋은 기억이건 아니건간에 나에게도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무덤까지 가져갈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미국과 한국이 아닌 다른 곳을 꽤 꾸준히 찾아보고 있는 이유가 이지안의 대화 속에 배어있습니다. 내가 잘한 일의 결과이건 잘못한 일의 결과이건 간에, 사랑의 추억도 증오와 미움의 대상마저도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나를 모르는 다른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속 소망이, 이제는 그 정점에 다다르고 있는 듯합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의 세상은 참 지저분하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선하기에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이 그나마 이곳 (뉴욕)과 저곳 (한국)에 꿋꿋하게 자신들의 길을 걷고 계시기에, 이들과 같이 견뎌내는 세상에 대해 아직은 - 하지만 그 끝은 반드시 있을 세상에 대해 - 기대와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쉽지 않은 세상 속의 삶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곧 올 듯 한 그 정점을 지나가게 되어 평안을 찾을지, 아니면 "과거는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그 어느 곳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빈 페이지를 채워나갈지 궁금합니다.
도피가 되었건, 타협이건, 또는 초월이건 간에 "나, 편안함에 이르렀나?" 하고 자신에게 물어볼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기를 바랄 뿐입니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