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으로 기억합니다. 성북구 월계동에 살던 시절이었지요. 7살이 되어가던 때였습니다. 그다지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아니었음에도, 그들 중에서도 우리 집은 가장 가난했던 집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집안 생계가 어려웠음을 기억할 만큼이나 되돌아보면 아픈 기억이 많은 기억 속 동네지만, 그래도 정겨웠던 기억 또한 꽤 많이 남아있는 곳이지요. 밤늦은 시간, 메밀묵을 파는 사람의 목소리, 군고구마와 군밤을 파는 사람이 구수하게 노래하듯이 반대쪽 골목에서 나지막하게 외치는 소리도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 대문을 열고 나온 후 오른쪽으로 걸어 나오면 조금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꽤 넓게 느껴졌던 길이지만 지금 보면 차 한 대만 지나갈 수 있었던 길이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꽤나 넓은 길이었지요.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이 길로 차가 다녔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아마도 이 이유에서인가 아닌가 싶습니다.
길 끝에 보이는 교회는 이름은 같으나 내가 다녔던 그 교회는 아닙니다. 아마도 80년대 후반 예전 위치에서 이곳으로 이전을 한 듯한데, 원래의 장위 교회는 저 길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 들어간 후 30미터를 걸어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콘크리트로 만든 계단 4개를 올라가면 안쪽으로 밀고 들어가는 두 쪽의 나무 문으로 되어있던 교회였지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간소하게 마련되어 있는 봉투함들과 주보 꽃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2층을 통해 3층에 있는 종탑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계단을 올라가서 종탑까지 올라가 본 적이 단 한 번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그만 창 밖으로 내다본 동네의 풍경은 사실 근처 여느 집의 옥상에서 볼 수 있는 광경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였을 뿐, 상상의 그것과는 달라서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들리던 차임벨 소리의 잔잔한 찬송가 소리를 잠결에 들을 때면 그 무엇보다도 따스하고 평안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 또한 남아있지요. 고작 7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내가 지금도 느끼고 기억하는 그때는 모든 것들이 지금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여유가 있었음을, 지금 그때를 기억할 때면 마음 한편이 아릴 정도로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자 마음속에 꼭꼭 새기곤 합니다.
이곳에서 장위교회를 다니던 시절 어느 가을날 오후, 토요일에 주일학교 전체가 근처에 있는 산에 놀러 갔었습니다. 30여 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주일학교 선생님들 3명 정도가 인솔하여 간 소풍이었지요. 교회 뒤편에 있던 개천을 건너가면 있는 작은 산으로 간 소풍이었으니, 거창할 것 없는 동네 나들이었습니다.
그 산 앞에 갈대밭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가을날의 갈대밭은 꽤나 아름답더군요. 아직까지도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음은 그 오후 해가 넘어가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뒤로하고 본 이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나 나는 이미 그 가장자리로 갈대밭 중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 디딘 갈대 속 땅이 단단했지만 어느 부분부터는 조금씩 물렁거린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두 발이 갑자기 깊게 갈대 아래쪽으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래는 보니 검은색의 진흙이 이미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고, 두 발이 진흑탕 속에 빠져있음에도 갈대 위로 고개를 내밀 수 있을 정도로 깊지는 않았지만 당시 내게는 큰 충격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르자마자 친구들이 저를 찾아내었고, 바로 근처에 있는 남자선생님에게 알렸고, 그 선생님은 바로 달려오셔서 저를 잡아 끌어내 주셨습니다. 물론 그 선생님의 발도 지저분해졌지요.
나름대로는 무서운 경험이었기에 나는 엉엉 울고 있었고, 이를 보던 여느 한 여자선생님이 나의 손을 잡고 근처에 있는 어느 집 마단 수돗가로 데려갔습니다. 눈물이 글성한 채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내 두 다리는 검은 진흙으로 범벅이가 되어 있었고, 이름 모를 풀들과 작은 벌레들도 많이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사실 어른들도 이런 것을 닦아내기는 거부감이 들 정도였지요. 하지만 이 여자 선생님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리고 그 와중에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시면서 두 손으로 제 다리에 붙어있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샅샅이 닦아내주셨습니다. 수돗물로 뿌리고, 다시 손으로 닦고, 비누로 또 닦고, 그다음 또 수돗물로 뿌려내는 것을 세네 번은 반복한 듯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우는 것을 멈추고 선생님이 제 다리를 닦아주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선생님은 구부려 앉은 채 환하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며 바라보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아한 모습의, 아마도 대학생이었을 나이의 선생님이셨지요.
제대로 된 교재도 시청각 자료도 없었고, 분필도 넉넉하지 않던 그 작은 교회였지만 이런 분들의 헌신과 사랑으로 나와 친구들은 그 시절을 참 (마음만이라도) 부유하고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지요. 집은 가난했어도 교회에 가는 길은 즐거웠고, 그곳에서 만나는 목회자 분들과 선생님들은 따스하고 보드라운 이불처럼 나를 비롯한 친구들 모두를 보듬어주었습니다.
인간이란 게 늦게 깨닫게 되어 후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나 또한 예외는 아니겠지요. 주일학교 교육뿐만이 아닌 학교 교육도 가르치는 사람의 헌신과 사랑이 없으면 그 후 그가 가르치는 것들이 학생들의 인성을 좋은 방향으로 형성함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게 되거나 또는 그저 자기만 잘 살려고 쓰게 되는 무기 같은 것으로만 활용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일반 학교교육도 이러할진대, 종교기관에서 가르치는 일이라는 것은 사실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듯이 하는 것이 아닌, '가르칠 수가 없는'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기에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저 헌신과 사랑을 바탕으로, 눈빛과 손끝으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음을.
그 후 십수 년이 지나 미국에서 나 또한 주일학교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이었지요. 뉴욕이라 갈대밭을 갈 수도 없을뿐더러 아이들 손 잡고 근처 공원으로 갈 일도 없는 (또는 웬만하면 안전상 가지 않아야 하는) 시절이었지요. 모든 것이 교회 안에 갖추어져 있어서 딱히 어딜 갈 일도 그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자료들도 모두 갖추어진 교회였지요. 예전 그 장위동 교회에 비교하면 그 열악함에 있어 수백 배는 차이가 나는 정도였였습니다.
여건은 풍족했지만 왠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느끼기엔 가르침의 성과는 눈에 띠지 않던 차, 어느 일요일 오후 Columbia University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있고 내년이면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분이 주일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기에 모두 모였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육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소개를 한 후, 교육 계획, 교재 및 자료, 그리고 진도관리 및 학생관리 등 전반적인 틀에 대해 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정보를 아주 멋진 presentation을 통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아이들의 정식적인 상태 파악 및 가정상황 분석까지 해야 한다고 하며, 세상 교육만큼이나 교회 내 교육 또한 모든 면에서 체계적이며 구조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강의를 마치더군요.
다른 선생님들은 이 분의 강의를 잘 받아들인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왜인지 1979년 그 가을날의 일들만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그리고 그때를 회상해 보니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유아부부터 대학부까지) 배운 것은 사실 하나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와 내 친구들을 가르쳐주신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잘못이나 능력부족이 아닌, 교회 주일학교 교육은 세상의 교육, 즉 공교육이나 사교육과는 너무나도 다른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intellectual 한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닌, 그 반대의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을 전달하는 오직 유일한 방법은 그저 헌신과 사랑을 바탕으로, 눈빛과 손끝으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음을 이미 그날의 일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이 분의 강의는 제 머릿속으로도, 그리고 당연히 마음과 영혼 속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강의를 해 준 사람에게는 미안했지만 내가 느낀 주일학교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무안을 줄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느꼈는지 얼굴이 붉어지더군요. 하지만 주일학교에서도 세상 교육방식을 적용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던 20대 초반의 나였음을.
"세상을 찾았더니 교회 안에 있었고
교회 안을 들여다보니 세상이 보였네"
Leonard Ravenhill 이란 영국의 목사님이 설교 중 하신 말씀입니다. 한탄과 탄식의 신음소리와 다름이 없지요. 종교, 학계, 정치, 사회 등 뒤죽박죽이 아닌 곳이 하나도 없는 지금, 저 말씀이 깊게 박혀옵니다.
과거의 것을 그리워함은, 지금이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이 후퇴를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삶이 편해지고 풍족함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넘치는 지금, 이것들이 과연 지금을 사는 각 사람의 정신적 그리고 (if you have one) 영적 상태에 더함을 줄까요, 아니면 해를 가하고 있을까요?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면 답은 바로 나오겠지요.
그저 헌신과 사랑을 바탕으로, 눈빛과 손끝으로 전달하는 수밖에 없음을.
"바람만 불어도 고개를 돌리는 우리, 이리로 저리로... 갈대처럼 색 바랜 모습으로, 하나는 모르면서 둘을 알려고 애쓰며 살지"라는 예전 한국 가요의 한 구절도, 어쩌면 같은 생각으로 쓰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이 그립기에, 그리고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기에, 지금을 살아가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싸우며 살아갑니다. 헌신과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려고 하지만, 상대가 쌓아놓은 벽이 높고 험한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둔할 것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나아갑니다. 결국 이곳에서 하는 모든 것들이 영원 속에서 메아리치며 나라는 사람을 판단할 것이기에. 그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 곁에 서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내 삶이 어떻게 비추어질지 두려워하며 매일같이 실패하지만 다시 돌이키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