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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l 09. 2021

"나의 학생, 그리고 나의 한 사랑 (5)"

"가보지 못한 Nyack 의 추억들"에 딸린 소소한 기억들

지혜와 드라이브를 한 다음 날부터 저는 아는 사람들을 통해 그녀가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날 밤, 지혜에게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했지만, 오후 3시가 지나도록 그녀의 이메일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해 볼까 했지만 지혜가 hand phone 도 가지고 있지 않던 때라 연락조차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 answering machine 에 제 메세지를 남겨놓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답답하더군요. 어느 삶의 형태에 오랜 기간동안 빠져 있으면 그 삶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 상식적인 현상이겠지만, 지혜는 그러지 않겠지 - 하는 기대감도 그날 오후가 지나 밤이 되니 결국 사그러지더군요.


일이 숨가쁘게 돌아가던 바쁜 나날들이라, 1시간이나 걸려야 갈 수 있었던 지혜가 일하는 Flushing 에 갈 수도 없었고, 그리고 가야 할지에 대한 결정도 하기 어려웠습니다. 예전 주일학교때의 사이에서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우리 둘만의 생각, 아니, 저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요. 몇 년의 거리감이 이렇게 큰 주저함으로 변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 나중에 이 때 이야기를 지혜와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도 그렇게 느꼈었다는 말을 하더군요.


다시 만난 후 3일이 지난 금요일 오후, 지혜의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던 무언가를 어느 시점을 지나 받게 될 때 받는 느낌은 결코 반가움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가끔 느낀 때가 있었는데, 이 때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옅은 분노감과 한 줄기의 모멸감이 뜨거운 바람처럼 뺨을 때리고 지나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녀의 이메일에는 이력서와 커버레터가 별첨되어 있었고, 그리고 3일간이나 걸린 그녀의 연락에 대한 이유들이 적지 않은 분량으로 영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한국어로는 자세한 심경을 아직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지혜는 이럴 땐 어쩔 수 없는 교포 2세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지요. 그녀는 매우 미안했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3일이나 걸려 제게 부담이 될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 후 결국은 이메일을 보냈다는 지혜 - 잠깐 들었던 하찮은 감정도 그녀의 편지에 사그러들고, 저는 지난 3일간 나름대로 선별한 직장에 그녀의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주말을 통해 다음 주 월요일, 뉴욕 시 외곽에 위치한 체이스 맨해튼 은행의 Call center 내 international banking center 에서 유닛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제가 3년간 알고 지내던) Dottie 가 지혜를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후 2회의 인터뷰, 그리고 구직을 확정하기까지 2주가 더 걸렸습니다. 지혜를 거의 15년간 알고 지낸 제가 볼 때 그녀에게 어울리는 직장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녀가 자의가 되었건 타의가 되었던간에, 지난 수년간 제대로 관리해오지 못한 그녀의 career track 에 비하면 일종의 leap 였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출근일, 아침 일찍 지혜가 전화를 해 왔습니다. 고맙다고, 열심히 하겠다고, 어려운 일 있으면 전화해도 되냐고... 저는 그녀에게 그리 하라고 했습니다. 제게 의지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첫 직장에 대해 준비하는 과정부터 홀로서기를 해야된다는 생각에, 인터뷰가 진행되고 확정되기까지의 한달여간동안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 날만은 제가 데려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집에 가서 그녀를 태우고, 데려다 주고, 그리고 Jericho Quad 라는 corporate center 주차장에서 그녀는 제게 모처럼 밝은 미소를 보이며 빌딩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하여, 삶이 안정되었었다면 이미 2년 전쯤에 시작되었어야 할, 제게는 동생같은 한 재미교포 2세 여자의 늦었지만 제대로 된 미국 직장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1999년 봄이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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